• 최종편집 2024-0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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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설교 100배로 잘 듣기
    교회가 되려면 두가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설교자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설교를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가 있어야 한다. 교회로서 최악의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설교자, 설교자의 말은 사람의 말로 듣는 청중이 있는 교회이다. 예수님이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 9)고 말씀하시고, 이 말씀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각 말미에서 반복하신 것(2-3장)은, 자기 백성들이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을 기대하신다. 말씀을 들으므로 "복있도다"라고 확신시켜 주신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라"(눅10:16).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반대로 그분의 말씀 전하는 설교자를 배척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짓이다. "전파하는 자가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왜 설교를 듣는 일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써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듣지 않는다거나 그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불경건이다. 인류를 죄와 비참에 떨어지게 한 것도 말씀을 구체적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대신 사탄의 말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니면 사탄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과가 결정된다. 회개와 믿음 그리고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신다. 에덴 동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아니었다. 듣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절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생각을 좇아 자기 길을 걸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든지 완악하게 하든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모든 사람은 말씀이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해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주목하게 하고자 하실 때 "이스라엘아 들으라"(신5:1; 6:4; 9:1)고 외치셨다. 죄인들은 듣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설교자들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해리 아이언사이드(Harry Ironside)가 자기는 설교하는 은사를 받았지만 회중들은 듣는 은사를 받지 못한 것 같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설교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만큼 중요하다면, 설교를 가볍게 생각하고 경멸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신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기를 배우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 오피니언
    • 목회칼럼
    2021-03-20
  • [특별기고] 교단의 정체성
    우리 교단은 자생적 교단이다. 설립하신 김치선목사님의 목회철학과 신학정신이 한국교회 교계 속에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남겨진 우리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든 틀을 재정비하고 새롭게 세워나가기를 소원한다. 1. 개척정신: 가서 우물을 파라 김치선 박사는 우리나라가 진정한 민주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변화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에게 ‘2만8천 동리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 있는 교회 수는 3,000 교회가 안 되었다. 더욱이 한 교단에 하나씩만 신학교를 허용했기 때문에 총회에서는 떳떳한 총회신학교가 있다며 대한신학교를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졸업을 해도 마땅히 사역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삼은 김치선박사는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에게 일할 수 있는 교회가 없으면 도리어 전국 방방곡곡에 나아가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라고 가르쳤다. 전국 2만8천 동네에 교회를 세워 이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는 이 민족의 십 분의 일이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결심하여 삼백만 부흥전도회를 결성하였다. 70인의 전도목사들을 전국에 파송하여 큰 역사를 시작하셨는데 그 중에는 박재봉목사, 이성봉목사, 손양원목사등이 있었다. 이 운동은 6·25전쟁이 일어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렇듯 구령의 열정 그리고 개척과 도전정신으로 대신 교단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교단 등이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그 이전에 있던 교회들의 분열을 통하여 교단이 구성되었던 반면에 교단은 순전히 졸업생들이 개척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 설립하고 그 교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의 힘으로,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생교단이다. 이러한 개척정신은 앞으로도 우리 교단의 정체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 편한 길을 쫓는 시대적 상황을 따를 것이 아니라 주님 부르신 그곳이라면 영적 야성을 가지고 나아가는 대신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발자취를 보여주었던 믿음의 선배들과 달리 현재 교회들마다 믿음의 야성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들을 때가 있다. 무엇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야성을 사라지게 할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영혼구원에 대한 무관심이 신앙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영혼구원에 대한 무관심이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우리의 관심과 생각을 변질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생각이 주님과 멀어지고 있다. 교회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영혼을 향한 갈망이 있는가? 외적 풍요로움과는 대조적으로 내적으로는 빈곤함을 호소하는 주변의 영혼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외적 자유로움과는 대조적으로 내적으로는 결박된 채로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주변의 영혼들의 영적 상태에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의 본질은 영혼구원에 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앞장서는 것이 교회의 비전이며 목적이다. 우리의 모든 사역은 영혼구원이라는 목적에 기반 되어져야 한다. 희망도 소망도 없던 이 땅 가운데 구령의 열정과 개척정신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하여 우리 교단은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제 지금 우리를 통하여 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기를 고대한다. 다시 우리 대신인의 중심 가운데 ‘2만8천 동리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간절한 구령의 열정과 개척정신 그리고 도전정신이 샘솟기를 바란다. 믿음의 야성을 가지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 데에 앞장서는 교단이 되기를 고대한다. 2. 애국정신: 한국의 예레미야 김치선박사는 당시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리셨다. 설교와 강의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항상 눈물로 호소하셨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나라가 망해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앞장섰다. 21살에 학생대표로 함흥의 영생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3·1운동을 준비하다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1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유학을 마치고 일본 동경에서 신숙중앙교회 사역을 할 때에 일본이 조선인을 내선일체라 하면서 조선인교회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조선사람도 내선일체이니 교회에서는 일본말로 설교해야한다는 것이었는데, 교회의 중직자중 한사람이 김치선박사가 조선말로 설교했다고 신고를 하여 수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와 남대문교회로 부임하셨을 때에 그 무섭고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매일 새벽마다 강단에 엎드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한없이 우셨다. 그리고 해방되었을 때에 신앙의 자유로 인하여 강단에 설 때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 그는 일제하에서는 나라와 민족의 서러움으로 우셨고 해방 후에는 기뻐서 우셨고 망해가는 심령을 위해서 우셨다. 그는 새벽마다 해방의 기쁨과 우리 민족을 향한 구원의 문제, 특히 한국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눈물로 부르짖었다. 그는 민족과 나라 사랑의 길은 복음전파를 통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한국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3천만명이었는데 우리 민족의 십 분의 일인 3백만명을 하나님께 바치자는,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기 위하여 2만8천동네에 교회를 세워질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하셨다. 김치선 박사가 보여주었던 들끓는 나라 사랑은 우리 대신인들이 품어야 할 고귀한 정신이 되어야 한다. 이 땅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되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때로는 적극적인 신앙고백을 통하여 나아가야 한다. 정교(政敎)분리라는 용어의 왜곡은 거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무관심이 곧 경건이라는 등식으로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정교분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치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이원칙은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받았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신대륙으로 건너가 국가를 세운 청교도들이 이런 종교 박해가 신대륙에서도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상당수의 교회와 교단들이 민족과 나라 문제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너무나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비난하거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도 끊임없이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통치자들에게 그 시대 시대마다 영적지도자들이 통치자와 권세자, 사람들 앞에서 신앙의 목소리를 내었던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통치자들이 올바른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한다. 하지만, 목사에게는 제사장직도 있지만 선지자직도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시대적 상황을 읽으며 때로는 하나님 주권을 훼손하려는 본격적인 움직임들에 대해서는 기도를 넘어서 신앙고백을 통하여 목소리를 낼 줄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 믿음의 선진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영적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만 하지 않았다. 학생대표로서 참여했던 김치선박사 뿐만 아니라 3.1운동을 주도한 지도자의 상당수가 목사였으며, 그리스도인이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일제의 만행에 맞선 분명한 목소리와 구별된 믿음의 행동을 보였다. 그런데 그 비슷한 시기 독일 내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나라를 향하여 그 어떤 신앙고백을 통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영적지도자들은 히틀러의 만행 앞에 침묵했다. 그들이 분명 기도했을지 모르지만, 기도에 따른 분명한 목소리와 구별된 믿음의 행동 등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한 역사를 남겼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의 한구석 구석에서 빛을 내고 맛을 내어야 한다. 사회 각 영역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신앙고백을 통하여 세상이 추구하는 인간중심적인 생각의 위험성에 대하여 알려줄 사명이 있다. 세상 가운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정치라고 한다면 신앙고백을 통한 정치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사명이다. 지금 우리는 유럽을 필두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들을 보게 된다. 그 나라 안에 하나님 주권이 완전히 무너지고 국민 주권의 목소리가 대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성경적 가치들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 할 때 교회지도자들은 아무런 반대도 할 수 없었고 지지해버렸다. 그로 인해 유럽에서는 부부가 아이에게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교육을 했다가 양육권을 박탈당하거나, 노방전도를 했다고 고발당해 체포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이 진노할 가슴 아픈 일들이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가고 있음에도 그 누구 하나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각 영역에서 신앙고백을 통한 정치참여를 반드시 해야 한다. 국가가 본래의 목적인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선한 도구가 되도록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은 성경이다. 이 성경을 통해 나의 생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정치에 참여하는 태도 등이 결정되어야 한다. 작은 부분부터 민감한 주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기준은 성경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와 신앙이 이원론적이라는데 있다. 우리 안에 신앙과 정치를 각각 개별적으로 가져가려는 모순점이 있다. 올바른 성경해석을 통한 기독교 세계관과 그 관점으로 해석된 정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영향받은 가정, 지역, 학연 등에서 파생된 생각들로 여전히 정치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지향하는 정당의 목소리 가운데 분명 성경적이지 않은 목소리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함에도 신앙과 별개로 무조건적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특정인을 지지하는 일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명백히 금하고 있는 낙태, 간음, 동성애, 무신론, 유물론 등을 지지하거나 정책적으로 실행하려는 정당과 정치인은, 자신이 지지하고 좋아했던 자라고 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세울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평소에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라고 해도 그가 명백하게 성경과 반대되는 주장을 하려고 한다면 무조건 그 정당과 정치인을 따를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도리어 그에게 무조건적 지지가 아닌 비판적 목소리도 낼 줄 알아야 한다. 목회자는 때로는 정치적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모습을 줄 수 있는 발언이라고 해도 그것이 성경적 가르침에 부합한다면 바른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소신 있게 성경적 가르침을 분명히 말씀해주는 목회자가 목회자지, 사람의 눈치를 보고 권력의 눈치를 보고 바른 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목회자이겠는가? 정치는 중요하다. 내가 선택하고 다수가 선택한 통치자가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정치에 더 이상 무관심하거나 한쪽으로만 편향된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통치자들을 끊임없이 예의주시하여 그들의 하고자 하는 정책들과 방향들이 하나님 주권과 상충된다면 때로는 한 목소리를 내어서 하나님의 눈치는 보지 않을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교회 공동체의 눈치라도 보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대신인이 가져야 할 나라와 민족을 향한 애국정신이라 하겠다. 3. 기도운동: 이 민족 삼천만 김치선목사는 남대문교회에 부임하면서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는데 기도 때마다 ‘이 민족 삼천만’이라고 외치면서 민족을 향한 기도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대문교회로부터 시작한 이 새벽기도의 물결은 전국교회로 확산하게 되었고,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독특한 예배양식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전쟁 후 삼각산에 기도원만 있던 시절에 성도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기도원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현재 서울대 기숙사 자리에 벧엘기도원을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대형천막을 치고 집회를 하다가 산을 깎고 기도원에 올라온 모든 사람들이 강에서 돌을 운반하여 하나하나 쌓아 올려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예배당 건축 이후 수많은 성도들이 모였고, 많은 성도들이 밤을 새면서 기도함으로 산에는 성도들의 기도 소리가 밤새 울려 퍼졌다. 그 기도의 흐름이 우리 신학교 다닐때도 주경야독하며 매주 목요일 저녁 강의가 끝나면 가짜 제일교회에서 내어준 버스를 타고 삼각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하지 않았던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물려주었던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등의 기도에 힘쓰던 모습들과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알리었던 모습들이 상당부분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시대가 바뀌었는데 꼭 그렇게 티 나고 유별나게 기도에 힘쓸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들과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조용하고 고상하게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생각들이 알게 모르게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보이게는 과도하다고 생각이 드는 그 행위들이 시대의 한 획을 그었던 위대한 믿음의 액션들이 되었음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에 힘썼던 과도하고도 무모한 그 행위가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많은 영혼을 건지는 한 획을 그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풍요로운 삶과 달리 빈곤한 기도로 일관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할 때에 다시 기도의 풍요가 우리 교단을 통하여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김치선박사가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세우기 위하여 눈물 흘렸던 그 기도가 바로 우리를 통하여 다시 시작되기를 바란다. 4. 대신이 나아갈 길: 회복과 화합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기독교인들이 밀려오고 있었고 평양신학교를 다니던 신학생들도 있었다. 이 때에 김치선박사는 신학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게 되고 1948년 남대문교회에서 야간 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대한신학교의 전신이다. 그 후 장로교 총회신학교에 파벌싸움이 일기 시작할 때에 1961년 김치선박사는 세계 기독교 보수계인 I.C.C.C의 메킨 타이어와 손을 잡고 성경장로회를 조직하여,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대신 교단으로서 출발하였다. 그러던 중 1968년 김치선박사가 소천 후 신학교운영문제와 성경장로회가 분리되어 나가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남은 40여개 교회를 필두로 대신교단은 도약하게 되었다. 그랬던 우리 교단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분열과 반목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예장백석과 추진했던 통합이 끝없는 갈등 속에 실패로 돌아간 이후 현재 대신수호측, 백석대신측, 예장대신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자랑스런 자생교단으로서 대신교단이 가졌던 정체성과 가치들이 훼손되는 시점에 와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일 수 있다. 다시 우리 교단은 정체성을 굳건히 하고 잘못되었던 병폐와 폐단을 회복하고 변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볼 수도 있다. 대신이라는 이름보다 김치선목사님의 목회철학과 신학정신이 한국교회 교계 속에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남겨진 우리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든 틀을 재정비하고 새롭게 세워나가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2021-03-20
  • [기획특집] 신영지주의를 경계하라
    이 시대의 교회나 크리스천들을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이다. 영지주의의 간단한 정의는 타락한 형태의 교의를 가진 한 이단사상으로만 판단하는 데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심각한 이단사상이다. 우리는 구원을 믿음(faith)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지만 영지주의는 앎(Gnosis)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좀 더 자세하게 접근한다면 앎으로, 사람의 기원이 신성에 있음을 알고, 이 깨달음을 통해 사람의 구성 중 영적요소인 영혼은 물질세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 영향으로 기독론에서 있어서도 정통진리와는 완전히 다르게 주장하는데 예수는 단순한 메시아로 화신하여 나타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해 우리는 엄격하게 정죄 또는 배격 한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 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언제부터인가 영지주의의 현상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 우려된다. 영지주의 사상의 적용은 이렇다.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하는데 심지어 하나님은 물질세계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며 악은 물질에서 나왔기에 하나님은 물질세계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 산물이 이원론적 사고가 나오게 되어 구원도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킨 결과 금욕주의 아니면 자유방임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주의 사상이 영지주의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오늘날 영적지형도를 볼 때에 신 영지주의(新 靈智主義)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가 많다. 구원은 분명 믿음을 통해서만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구원을 가져오기에 다른 조건을 첨가하게 되면 다른 복음이 된다는 것이 절대 진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절대 진리를 적용하여 요구되는 믿음의 현상과 열매와는 사뭇 괴리감이 있게 되어버린 현실이 영지주의 현상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두렵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신 영지주의라고 정의하고 싶은데 안타까운 영적 현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자유방종이다. 음주나 흡연, 도박, 마약, 동성애, 폭력, 범법 등 기타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개인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점점 합리화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갈 5:13) 둘째, 행함의 신앙생활을 부정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신앙행위를 우리는 목숨처럼 알고 지켜왔다. 주일성수를 비롯한 십일조 생활이나 헌신의 삶을 한국교회가 강조하며 지켜왔다. 이제는 어떤 것이든 강조를 하면 율법주의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하셨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약 2:22). 셋째, 천국에서의 부활영생을 잊고 산다. 막연한 천국이 아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입고 오신 성자이셨으며, 그 육체가 부활의 육체가 되셔서 승천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절대 소망은 우리의 부활 이후의 영원한 천국의 삶 즉 부활영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나 교계도,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가치관과 행위들이 오로지 이 땅이 절대 영원한 소망인 것처럼 보이는 삶의 가치관이나 삶의 모습들이 두렵다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전무후무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말자. 반대로 냉정하게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를 깊이 묵상하며 회개하자. 부디 신 영지주의 현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 오피니언
    2021-03-20
  • 서경노회 118회기 제1차 임시노회 개최
    서경노회는 2월24일 송도가나안교회(김의철 목사)에서 118회기 제1차 임시노회를 개최했다. 이날 1부 예배는 부노회장 류광규 목사의 인도로 회계 박진경 목사의 기도, 회의록서기 장병길 목사의 성경봉독후 노회장 정덕화 목사가 ‘남 달라서’란 제하로 설교했다. 이어진 예배는 서기 김홍식 목사의 광고, 증경회장 김의철 목사의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제2부 회의는 노회장 정덕화목사의 사회로 직전노회장 이종권 목사의 기도후 안건을 처리했다. 이날 상정된 안건은 한덕규 목사 가입 청원 건, 송도가나안교회 담임목사 청빙 건, 김포청운교회 당회 조직 건, 청운교회 장로 증원 건, 하늘꿈교회 당회 조직 건, 유영춘 선교사 노회 가입 건, 노회 규칙 수정 건 등이다. 3부 신년하례는 노회장 정덕화 목사의 인사말, 증경노회장 강대석 목사와 증경노회장 오세종 목사의 덕담, 한상용목사의 폐회 기도로 마무리 됐다. 정덕화 목사는 “코로나19라는 상황속에서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서경노회 118회기 제1차 임시노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린다”면서 “장소를 허락해 주고 섬겨준 송도가나안교회 당회와 성도, 김의철 담임목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2021-03-20
  • [기획특집] 고봉 김치선
    김치선 박사는 1899년 8월 10일 김영준씨와 최현숙 여사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8년 2월 24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김치선 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쉼을 누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김치선이 남대문교회에서 어떠한 사역을 하였으며,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김치선이 선택했던 결정과 복음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박태선과의 관계를 갖게 되는 과정과, 김치선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재일교포를 위하여 어떠한 선교사역을 하였는지를 살펴보려한다. 제 1장 남대문교회와 김치선 목사1944년 5월 일본에서 돌아온 김치선 목사는 서울에 있는 남대문교회의 제 6 대 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 당시 남대문 교회는 교통이 원활한 서울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갈리기 전에 전국에서 영락교회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였다.이승만 대통령과 김구선생이 자주 출석하기도 했다. 손양원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시고 300만 구령운동을 남대문 교회를 중심으로 일으켰다. 김치선 목사님은 부임하면서부터 새벽기도회를 계속하였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였다. 김치선 목사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신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었는데 김치선 목사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이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김치선 목사는 그 암담하고 어수선한 시기에 매일 새벽제단을 쌓으며 강단에서 엎드려 민족을 위하여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매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때부터 그를 조국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렀다.김구 선생은, 김치선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던 남대문 교회의 교인이었다. 따라서 김구 선생과 김치선 박사는 각별한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선생은 매 주 한 번씩 김치선 박사를 집으로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김치선 목사와 신앙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또 그의 아들 김신(金信)씨의 결혼식 때에도 그 주례를 김치선 목사에게 부탁하였다.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 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해방된 기쁨의 눈물, 자기 과거에 대한 회개의 눈물, 우리 민족을 향한 구원의 문제, 한국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남대문교회는 귀환 동포들의 안식처이자 소식이 끊어진 친지들의 행방을 알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역에서 내려 찾아드는 그들에게 교회는 뜨락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삼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이만팔천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그의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박태선장로와의 관계는 그의 지도력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하였다. 1. 삼백만 부흥운동의 전개 1907년 대부흥의 물결이 2-3년 지나자, 부흥의 열기가 차차 식기 시작하면서 교인들의 열성이 기울기 시작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일제가 기왕에 시작하였던 한국 식민지화를 가속화하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한국을 강점 병합하여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따른 사회의 불안과 모든 사람들의 좌절을 보면서, 교회는 이런 때에 낙담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을 일깨우면서 교회의 부흥운동을 재개하게 되었는데, 이 운동이 곧 100만명 구령운동이었다. 1909년부터 1910년간에 백만명 구령운동 (Million Souls Movement)이 전개된 일이 있었다. 백만명 구령운동은 1909년에 개성에서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 (M. B. Stokes), 갬불 (F. K. Gamble), 리이드 (Miss W. T. Reid) 등 3인이 다시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당기기 위해 사경회와 기도회를 한 주간 동안 갖기도 하고, 한국 교인 몇 사람과 함께 산상기도회를 개최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도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은 1909년 9월에 개최되었던 남감리교회 연차대회에 참석하여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하는 표어를 채택하도록 요청하여, 이 표어가 채택되었다. 이 연차대회가 폐회한 후 바로 열렸던 복음주의 선교연합공의회 (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위의 3인 선교사들은 이 공의회의 전도 목표를 채택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백만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100만명 구령운동”이 정식으로 출범을 하게 된 것이다. 1910년 선천에서 모인 장로회 제 4회 독노회에서도 100만명 구령운동에 적극 참여키로 의결하고, 7대리회에서 특별위원을 선정하여 이 일을 추진하게 하였으니, 이날이 한국이 일제에 병합된 지 꼭 20일이 지난 때였다. 이 운동은 한국에서 전도를 위해 남녀노소, 신자들과 학생, 평신도와 교역자들이 전심전력하여 이 표어의 구현에 노력한 전국적인 운동이었다. 전국의 각 교회가 연합하여 백만명전도회를 조직하고 각 지역 교회의 유력한 교역자들이 먼저 서울에 모여 1개월간 시내 전역에 축호전도를 함으로써 귀도자가 많았고 이로부터 전국 각지를 분담하여 계속 전도함으로써 많은 수확을 얻었다. 김치선 목사가 백만명전도운동에 영향을 받아서 삼백만 부흥 운동을 일으키던 때는 1946년이었다. 해방 이후의 정치적인 혼돈기였다. 당시 남북한 전체인의 인구가 3천만이었으므로 십일조에 해당하는 3백만이라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보자는 취지 아래 삼백만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 달에 한번씩 초청 강사의 부흥회를 가졌는데 박재봉, 손양원, 배은희, 김인서 등을 강사로 하여 금식과 철야기도 운동을 벌였다 (배명준 목사와의 대담, 1978년 8월 19일 재인용). 삼백만 부흥운동을 시작할 때 세 가지 중점목표를 가지고 진행되었는데 첫째 성령운동, 둘째 말씀운동, 셋째 회개운동이다. 당시 남대문교회 주일 학교는 교사 김성섭, 이의환, 김영정, 박동윤 등이 인도하였는데, 어린이 전도대원들은 북을 치고 나발을 불며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가 서울역 앞과 공원에 모인 군중들에게 복음을 외치면서 전도지를 배포하였다. 청년들로 구성된 전도대원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공창지역인 묵정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공창 폐지를 외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 곳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1950년 5월 중순 6.25가 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남대문교회 청년들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대한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삼 백만 부흥운동의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약 70여명의 전도대원들은 당시 공산당들의 출몰이 잦았던 38선 접경지대와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인하여 패잔병 공비들이 있던 지리산 지역과 제주도 한라산 일대에 복음전파의 사명감을 갖고 전도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전도대원들은 6.25로 인하여 대부분 선교지에서 순교를 당해야 했고 지금도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들 결사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의환 목사의 경우 6월 상순경에 38선 지구에 파송을 받았다. 개성지구, 연백지구, 옹진지구로 3조가 파송되었는데 마지막에 옹진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는 개성으로 가서 전도집회를 일주일간 갖게 되었다. 낮에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며 노방전도를 하였는데 시장에 가서 전도지를 뿌리면서 전도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전방 참호 속에 들어가서 대북방송을 하기도 하였는데 전도 설교를 하면서 찬송을 부르기도 하면서 흘러간 노래들을 불러주기도 하였다. 또한 군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에게 전도하였다. (이의환 목사의 증언, 기독교 방송 “한국의 교회”에서 방송, 1979년 1월 28일). 이들 전도대원의 가슴속에는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서로 반목질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으며 어서 속히 복음을 하나가 되어야 되겠다는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후 1962년에 이르러 삼백만 부흥운동의 결사대로 공비들이 출몰하던 지리산 지역에 파송받았던 대원 중 정관백 전도사가 공산군에 의하여 순교하였음이 밝혀져 남대문교회가 지리산 지역인 구례군 산동면에 비석을 세워 그를 기념하였다. (1962년 11월 21일 당회록). 산동교회의 사연은 너무나 처절한데 일명 과부교회로 불리우리 만치 동란을 겪는 동안 교회의 남자는 모두 목숨을 잃어 버렸다. 그리하여 여자의 손으로 나무를 찍어다가 예배당을 지었는데 남자라고는 60세가 넘은 영수 한 사람 마저 건축자재를 사서 싣고 가다가 소달구지가 뒤집혀 죽고 말았다. 이곳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산불’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여인들만이 사는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이 곳에서 염명수 목사가 고아원과 자모원을 하였다. (배명준 목사와의 면담, 1979년 8월 19일). 채기은은 삼백만 부흥운동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해방 후 민족 전체가 국가발전에 열중하고 있었느니 만큼 삼백만 부흥운동은 크게 호응을 보지 못하였었다고 하였다. 사실 이 운동이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대중집회를 한다든지 초교파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려는 강한 도전을 받고 사명감에 충만한 사람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는 한국교회사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2. 2만 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 삼백만 부흥운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사역은 2만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사명이었다. 증경총회장인(12대) 신현기 목사는 말하길 2만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것은 개척자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정신이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실에 신학교를 졸업 한 후 부교역자나, 교회청빙을 기다리기보다는 나아가서 교회를 개척하며, 특히 교회를 개척할 때는 다른사람이 가지 않는 벽고지나 농촌, 어촌, 등으로 가도록 권장하였다. 이어서 말하길 김치선 목사야말로 개척자의 삶은 살아 온 증인이었기에 이와같은 부르짖음이 가능하였다. 대한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당연히 교회개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심지어 학교에 재학중에도 개척교회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였다. (신현기 목사와 대담 2001년 5월 17일) 1950년대에 우리 민족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수난과 궁핍과 처절한 생활고를 해결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다시 번영할 수 있는 비결을 영적 운동에서 찾았다. 김세창 박사는 그의 책 빛을 향하여에서 이 우물파기 운동이 영적으로 전개되어 김치선 목사 생애에 3천여 명의 제자를 내고 목숨까지 바친 마지막 운동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다시 말해서 동네마다 우물을 파는 운동이니 대한민국을 통틀어 2만8천여 동네였다. 마당에 우물을 파고 이 우물로 교회를 세우는 운동이다. 동네마다 우물인 교회가 세워지니 심령이 변화되어 예수 믿고 변화 받아 영생의 자리에 들어가고, 마음이 깨끗해져 부정과 사리사욕이 멀어지고, 예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니 우리 나라는 천국을 이룰 것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는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선진으로서 불쌍한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근원이 될 것이다. 이 때에 “교회 세우러 가자”는 표현 대신 표어로 내세운 것이 바로 “우물 파러 가자!”였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서, 생수를 받아 영적으로 육적으로 축복받는 특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신약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이 우물을 파는 일을 했으니 동네마다 나라마다 지방마다 나아가서 교회를 세우고 천막을 기웠으니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님 축복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창 12:1-3). 김치선 목사는 대한신학교 학우회지인 우물 창간사에서 말하길,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우물을 파는 것이다. 신학도들은 금년으로 우물 하나씩을 팔 결심을 하여 그대로 실현하기를 바란다.”(1955. 12. 13)라고 하면서 교회개척을 강조하였다. 3. 김치선 목사와 박태선 김치선 목사에게도 간과할 수 없는 실수가 있었다. 그것은 박태선과의 관계에서였다. 정성구 박사는 “김치선 박사는 1950년부터 총신교수로 9년간 봉사했다. 그리고 그는 1960년 성경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또 대한신학교 교장으로 평생 일하였다. 한때 박태선 장로와 더불어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것이 그의 생애 가운데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연세대학교 민경배 교수는 김치선 박사와 박태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태선 장로의 철저한 섹트(sect)적 사회 윤리의 감람나무, 곧 한국 ‘예수교 전도관 부흥 협회’는 6.25 사변 후의 교계와 일반 민중 사이에 불길처럼 확대해 갔다. 김치선 목사 창동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은 그는 1955년 3월 하순, 남산 광장에서 김목사와 미국의 스완슨 부흥사를 초빙하여 함께 대대적인 연일 연속의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신구약의 예언된 ‘감람나무’를 차저하면서, 토착적 민간 신앙에서 흔히 쓰는 심정의 광란 상태를 일으키는 술수(박수, 발장단, 몸 흔들기, 고성방가, 통곡기도)를 팔 다리로 삼아 전란 후의 신앙 심리의 행방을 포착, 거기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남산 부흥회에서는 난데없이 썩은 뼈 타는 냄새가 나더니, 그 악취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백합화 향기가 나기 시작하고 이슬비 내리고, 기이한 광채가 그 분위기 속에 자욱했다는 이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며칠 사이에 서울 가두마다, 부흥회 천막의 들보나 밧줄에 신비한 광채가 찬란한 사지 복사판들이 나붙기 시작했다. 병자의 기적적 치료와 성신의 효험있는 임재가 부흥 군상들의 대화 속에서 놀라움으로 전달되어갔다. 이들은 결국 일단의 성도적 공동사회-천년성-를 형성하여, 경기도 소사, 덕소, 그리고 경남의 기장에 신앙촌을 건설하고 자급자족의 종교적 경제 공영사회를 이룩했다.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이하면서 김치선 목사는 남대문교회에 시무하게 되었고, 일본에서부터 알게되었던 박태선 집사는 남대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를 나와서 창동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을 때도 함께 행동을 했다. 박태선은 서울 창동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뭇성도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교회의 모범으로 봉사하던 박태선 집사가 창동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치선 목사는 그가 은혜를 받았다고 교만하여 탈선할까봐 걱정하여 그에게 대한신학교를 다녀서 신학공부를 해야 탈선하지 않는다고 늘 권고했다. 그래서 그는 신학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바쁜 생활에 미루어 오다 결국은 김치선 목사의 우려대로 신학의 바탕이 없이 은혜를 받아서 그만 탈선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박태선 장로가 김치선 목사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목사님! 앞으로 내가 집회하여 얻은 이익은 반드시 대한신학교를 위해 쓰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이 말에 감동받은 김치선 목사는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그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했다. 김치선 목사는 1954년 발행된 복음세계 제3호 “실업청년과 복음운동”이라는 글에서 말하길 박태선씨를 김치선 목사가 추진하고 있는 복음운동의 취지를 잘 알고있는 분으로 소개하면서, 기성교회에 불합당한 행동을 하는 자가 없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인들 가는 것을 막기만 하지 말고 교회의 지도자가 그 집회에 참석해보고 바른 비판을 하여 교인을 선히 인도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다. 1955년 3우러 28일부터 시작된 남산고원(조선 신궁터 광장)에서 열린 집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고,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을 체험한 신자들을 자신의 모든 귀금속과 재산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헌금했다. 집회가 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박태선 장로의 생각은 김치선 목사와는 달랐다. 박태선 장로는 자신의 약속대로 집회의 헌금을 대한신학교를 세우는 데 쓰기보다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도관을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치선 목사는 대한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재정이 필요하였고 이것을 충당하기 위하여 박태선과 모정의 약속을 하고 집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나 박태선이 약속을 이행하지 아니하므로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지도자로서 사람을 잘못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박태선 장로의 탈선은 급기야 한국의 목사님들이라도 자기에 와서 안수 받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성령이 없는 사람이요, 구원받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목사 자격이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기에 이르렀다. 김치선 목사도 자기를 순종하고, 따라야 참 사람이 되고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악령에 속한 사람이니까, 자기에게 와서 회개하고 생수를 마시라고 했다. 이로 인해 김치선 목사는 그와 결별을 하게 된다.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 장로와 함께 집회를 했던 것은 대한신학교를 사랑하고, 육성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동기의 협력이 결국 집회의 성공에 따른 박태선 장로의 탈선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있어 크나큰 오점으로 남고 말았다. 박태선 장로가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교계의 원로였던 권연호, 김치선 목사 같은 이들과 윤치영씨 등 정계 요인의 후원이 컸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다른 김치선 목사의 실수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산군이 남한을 침략함으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공산군이 삼일만에 서울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이소식을 듣고 교회를 떠나 삼각산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남대문교회에서는 김치선 목사가 삼각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대표로 한상기 장로가 삼각산에 갔다. 배명준 목사가 남대문교회의 부목사로 시무하였는데 그는 숨지 않고 서울에 있었다. 한상기 장로는 김치선 목사를 설득하여 교회로 내려 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한상기 장로는 김치선 목사에 의하여 거절당하고 삼각산을 내려갔다. 그후 삼각산에서 내려온 김치선 목사는 삼개월동안 지하에 숨어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옥오열 선교사의 도움으로 한경직 목사 가족과 김치선 목사 가족, 그리고 총회장 권연호 목사 가족이 피난을 가게 되엇다. 박용규는 지적하기를 ‘6.25동란이 일어났을 때, 교인들보다 먼저 피난을 갔던 것이다. 그러나 교육목사로 있던 배명준 목사는 교인을 다 피난 보내고 그 후에 떠난 고로 6.25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된 후 남대문교회에 담임목사로 계속 시무하게 되었으나, 김박사는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김박사는 학자이지 목회자는 아니였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상황이 김치선 목사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를 지켜야하는 목사의 사명과 어려운 상황를 피해 피난을 가야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김치선 목사는 후자를 택함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끝난 후 동사목사이었던 배명준 목사에게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인계하고 자신은 창동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상의 사건들이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를 시무하면서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삼백만 부흥운동’과 ‘이만 팔천동네에 우물을 파라’고 하는 운동은 1940년대 후반의 한국교회상황이 복음을 증거해야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김치선 목사의 중대한 업적으로 평가 할 수 있지만, 이 운동들을 조직하고 진행하는 행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열약한면을 보여주어 나아가자는 구호는 외쳤지만 한국교회를 움직일 만한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더욱이 박태선과의 관계에 있어서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을 바로 알지 못함으로 한국교계에 엄청남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치선 목사는 그 누구보다도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였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했으며, 개척정신을 부르짖었다. 김치선이 한국과 일본에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지만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어서 한국교회에 대형교회로 자리잡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에 지금까지도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 2 절 일본선교 : 선교사로서 김치선 카나다 장로교회 소속인 영재영 선교사가 일본으로 파송 받게 되었을 때 김치선은 영재영 선교사와 함께 가서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일본에서 신학교육을 마쳤고 일본에 대한 체험에 있었으며, 당시 일본 안에 있었던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안양대학교 신학부 약사를 저술한 최정인 목사는 김치선 목사에 대하여 말하길 김치선은 1930년 2월 23일에 일본 신호중앙신학교를 졸업했다. 김치선의 나이 31세였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위한 순회목사로 취임하였다. 그의 사역지는 쓰시마, 큐슈우, 훗가이도, 아모리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일본 관서지방의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동경 잇지신학교에서 강의도 하셨다. 김치선 목사는 영재영 선교사의 후원으로 동경 YMCA 대강당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특히 김치선 목사는 1939년부터 1944년 까지 재일교포를 위하여 니시노마아교회, 혼요고교회, 아까시교회, 대판 동부이 와까야마교회, 모리베교회, 메구로교회, 이께부르교회등을 개척하였다.(2000년 10월 20일 최정인 목사와 대담) 또한 신호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였고, 동경신숙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 대단한 부흥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경신숙중앙교회에 가면 조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요일이 되면 믿지 않는 유학생들도 자기 친지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교회로 나왔다. 그래서 늦게 가면 교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 그 교회의 제직이나 성가대원들은 후일에 한국을 위해 공헌한 유명한 분들이다. 또 일반 교인들도 후일에 귀국하여 국회의원, 공직자,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교육가, 사업가, 과학자, 유명한 목사들로 활약하게 되었다. 일제시대부터 유명했던 음악가 고 이인범선생은 성가대를 지휘하였고, 와싱턴 D.C.에서 ‘한국의 소리’에서 일하시다가 작고하신 고 황제경 목사는 성가대원의 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의 조선인의 유학은 일본이었다. 그러므로 김치선 목사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어서 동경안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도자의 위치가 상승함에 따라 모든 행동에 세심한 주의가 요구되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일본이 한국교회에 대하여 강압정책을 펴고있었고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예배전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목회자에게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런데 1940년 김치선 목사는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중직가운데 한사람이 김치선 목사가 한국어로 설교했다고 경찰에 신고하였기 때문이었다. 김치선 목사에게는 약 일년간의 감옥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김치선이 수감생활을 하게 됨으로 인하여 본인뿐 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김치선 자신의 사명을 더욱더 확고히 했으며,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고 있지만 이 일이 오히려 김치선 목사 민족의식을 새롭게 고취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김치선 목사는 과거의 자신의 화려한 생활을 잊어버리고 주어진 현실에 충실함으로 오히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고, 또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잘 진행디면 현실에 따라 안주하기 쉽고, 반면에 조그만 어려움이 닥쳐 올 때에 실망하고 낙심하며 또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쉬운데, 김치선 목사는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절대 미워하지 않았고,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향하여 불평하지도 않은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절제함으로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 전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 교포를 상대로 한 전도 및 선교활동을 의미한다. 1911년 도쿄에 있던 감리교 출신 유학생들이 따라 감리교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같은 지역에 장로교, 감리교가 따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일본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라 하여 일본에서만큼은 초교파적 연합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또한 장로교측으로서는 중국 산동지방에 현지인을 위한 선교를 계획하고 있어 일본 선교까지 단독으로 추진하기엔 벅찬 감도 있었다. 그 결과 장로교 독노회와 미감리회, 남감리회가 동의하고 재한 복음주의선교부 연합공의회에서 실무를 담당하기로 했다. 교회명칭은 ‘재일본동경조선 예수교연합교회’로 하였으며 교역자는 장로교, 감리교에서 2-3년 교대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장로교에서 주공삼 목사가 연합교회 초대목사로 파송되었고 1-3년 주기로 장로교, 감리교에서 교대로 파송했는데 김치선 목사는 1935년부터 1944년까지 목회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 교단 소속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치선 목사의 열정을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를 이끌고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한다. 그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면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뜨거운 가슴의 열기만이 보이지 않는 신앙 세계를 이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의 아성을 쌓아 놓고 자기 위주로 교단을 이끌어 가기도 하고 목회를 하기도 한다. 때문에 오늘 한국의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의 전체 공동체보다 개교회주의로 흘러가 그곳에서 안주하려고만 한다. 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김치선 목사는 어느 곳에 가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여러번 사역지를 옮겼지만, 심지어 감옥에 들어가는 어려운 상황을 만났지만 굴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사명인 영혼구원을 위하여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였음을 볼 수 있다. 김치선 목사야 말고 대신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 있기 전에 최초의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달. 김동화는 말하길 ‘구슈와 시모노세기에서 북쪽 훗가이도까지, 조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복음 전했다. 가는 곳마다 믿는 자가 생기고 그 곳에 교회를 세웠다. 처음에는 가정집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그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날마다 믿는 자가 더해 갔다.’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김치선 박사의 남대문교회에서의 목회활동을 통하여 열정적인 목회자의 모습을 보았고, 일본에서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헌신적인 선교사로서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후대에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겸손한 자세로 대하면서도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는 추호도 양보가 없었던 그 확고부동한 신념과 강인한 성품은 한국교계를 대표하는 목회자중의 한사람으로, 또한 선교사중의 한사람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오피니언
    2021-03-20
  • [창간 축사] 총회장 강대석 목사
    “펜은 칼보다 강하다”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은 사고· 언론, 저술, 정보의 전달은 사람들에게 그만큼 더 큰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환유한 말이다. 더구나 전달 수단이 발달한 작금의 현실속에서는 펜은 신처럼 군림할 때가 있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해 수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신문의 생명인 정론 직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같다. 신문의 사명은 사실을 정확히 알리고, 현재의 시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지만, 편견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의도된 시각으로 진실을 외면한다면, 그 신문은 이미 생명을 다한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기독연합신보는 창간을 맞이하여 정론 직필을 선언하고, 더 나아가 민족복음화의 역량을 감당하고, 개혁적이고, 시대 앞에 예언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신문의 사명을 감당하며 나가기 위해서는 갖가지 불의와 대적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신문으로서 소명의식을 잃지 말고 꿋꿋하게 버텨고 서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과 전 세계는 COVID-19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버린 답답함속에 서 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맞이하여 안타까울 뿐, 어떤 뾰족한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시대에 기독연합신보는 나타난 이런 환경 앞에, 차분하게 대처하면서 목회자와 대한민국 성도 앞에 대안과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날 한국 교계 앞에 “이만팔천 동리에 우물을 파라”는 개척과 애국 기도의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기독연합신보의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더 높은 비전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시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21-03-20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설립자 백정란 명예이사장 소천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설립자 백정란 명예이사장이 2021년 3월 12일 오후 5시경에 소천했다. 1939년생인 고 백정란 명예이사장은 재무부 총무과, (주)인데코 대표이사,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이사장, 성서유니온선교회 이사장, 기독교사회복지협의회 여성대표, KBS 이사 등을 역임하며, 큰 역활을 감당했다. 빈소는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3층 강당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3월 15일 오전 8시이며,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에스라대학원대학교 동산에서 수목장으로 진행됐다. 장례는 학교장으로 진행하며 조의금은 고인의 뜻에 따라 학교 발전 후원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 교계소식
    2021-03-20
  • 총회의 카페가 오픈을 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코로나로 멈춰버린 일상으로 고통받는 동역자를 볼 때 아픈 가슴이 저며 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승리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반드시 회복되고 우뚝 서리라 믿습니다. 그간 교단의 통합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안타까운 심정으로 머뭇거리던 마음을 비우고 교단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 후배님들의 고견을 경청하고 미래를 책임지고 이끌 수 있는 교단으로 세워갈 것입니다. 연말에 상임부서와 노회장님과 총회 임원과의 상견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깊어가는 코로나로 보류하고 있습니다. 신년에는 총회 상임 부서장님들과 우리 총회의 기둥인 노회의 임원 목사님과 총회 임원이 함께 신년을 하례하는 행사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어 실행위원회를 통해 우리 총회의 나갈 길을 열어가려고 합니다. 신학이 없으면 교단은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총회는 호서대학과 인준을 준비를 마치고 대학원 커리쿨럼을 우리 총회에서 위임하여 교육을 통해 후배를 양성할 수 있도록 위임받았습니다. 그 외 다른 대학과의 MOU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우리 총회는 우리 신학으로 후배를 양성하는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4-5년 후에는 알차고 멋지게 다져져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대단한 총회가 될 것입니다. 총회도 슬림한 총회로 모든 권한을 노회에 위임할 것입니다. 상임위 및 부서장과 총회 임원은 카페에 공지하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이 만나고 싶었습니다. 총회의 카페가 오픈을 했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가입하셔서 함께 소통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대신총회] http://naver.me/GfZhCoAn 추후에는 카페에서 소통하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다시 복음 앞으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목양 이루세요. 기도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20년 12월 19일 총회장 강대석 목사 드림.
    • 오피니언
    2021-03-20
  • 가나 혼인집에서 있었던 기적
    찬송: 309장 기도: 가족중에서 성경: 요한복음 2장 5절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아멘 제목: 가나혼인집에서 있었던 기적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로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있었던 기적의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이제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친척 집에 혼인이 있어 그 전통 전례에 따라서 가족 친지 애경사에 참석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혼인 잔치에 가셨지만, 혼인집에 큰 관심은 두시질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어머니의 간청에 따라 가나 혼인집에 갈 수도 있었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냥 혼인 잔칫집이려니 하고 가셨지만, 마리아는 아닙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가나에서의 혼인집과 마리아와의 관계는 상당히 특수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혼인 집에서 마리아의 역할은 자기 일처럼, 또는 자기 집 일처럼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관심을 가지셨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살피는 가운데에 이제 혼인은 진행이 되었고 또 잔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초대되어 온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오셨기에 준비되었던 포도주가 금방 바닥이 났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마리아가 발견한 것입니다.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고 또 그 혼가에 있어서 어찌 보면 자존심이고 얼굴인데, 포도주가 중간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한창 무르익어가는 잔치에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초대된 손님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또 그렇게 준비성도 없는 가정이라고 하는 낙인이 걱정으로 밀려온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상당히 난처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당장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포도주를 어디에서 준비해 올수도 없는 것이고 이런 때, 마리아는 해결책을 생각하고 그 즉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기적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기치 않는 일을 만났을 때나 혹은 난처한 일들을 만났을 때,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는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다양한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잖습니까? 그런 문제들이 우리에게 힘에 겨울 때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내가 풀려고 하면은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찾아서 주님께 부탁하면 쉽게 해결이 되지요. 이런 경우를 우리가 경험적으로 나타날 때, “아! 이럴 때 주님이 내게 계셔서 문제를 쉽게 해결해 주시고 나로 순탄한 길을 가도록 만들어 주셨구나!” 하는 그 경험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니 힘든 시간은 길어지지요. 다시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마리아는 그런 난처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예수님을 찾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별 그렇게 반응이 없습니다. “아직 내 때가 아닌데 뭘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시는 반응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기에 하인들을 불러서 “너희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든지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다짐의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께는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셨고, 하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기적의 현장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영적인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이 상황을 본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본 상황대로만 된다면 오늘 이 혼인 잔치에 기적이 일어난다.!! 하는 그 믿음! 예수님을 보면서 그 기적을 내다본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내 삶에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야 내 삶이 변화되는 걸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을 때 한 가지 다짐은 오직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면 나는 그분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순종할 마음이 없는데 주님을 찾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았고, 하인들에게는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시지요? 마리아의 생각은 이게 잘 어우러지게 되면은 그다음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하는 믿음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가나 혼인 잔칫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웠습니다. 하인들은 그냥 채운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해서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이것은 더는 채울 수 없을 만큼 다 채웠다는 의미입니다. 하인들 보세요! 이왕에 물을 채우라 하셨으니 가득 채워 버린 것이지요. 순종은 그렇게 통 크게 해야 큰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니 열심히 갔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보는 땅, 밟은 땅을 내가 다 너에게 줄 것이다. 그랬더니 엄청나게 밟았고 헤브론까지 올라가서 엄청나게 바라봤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든 그 말씀을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합니다. 한 발 더 앞서 이행을 해야 합니다. 가령 하인들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했어요. 그런데 반만 채웠다면 기적은 그 반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충만하게 채웠을 때는 그 기적은 충만하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기적을 적게 보기를 원하십니까? 크게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찾을 바에는 그 말씀을 따라서 충만하게 순종하세요. 충만하게 순종을 하시면 충만한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혼인 잔칫집을 통해서 본받는 교훈입니다. 문제 앞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혼인집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혼인집에 초대됐던 사람들이 그 가정을 칭찬하고 그 가정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찾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가정에도 이런 역사가,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를 믿으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적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으로 마침.
    • Mission
    2021-03-20
  • 성지순례의 참 의미
    한국교회의 대표적 성지 중 하나인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에는 해마다 50만 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오간다. 전주교구 치명자산, 수원교구 미리내성지, 원주교구 배론성지 등에도 한 해 수십만 명의 순례 발걸음이 이어진다. 특히 9월 순교자 성월이면 각 성지들은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순례객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성지가 순교성지인 덕분이다.성지순례.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신심행위의 하나로 꼽힌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이끈 대표적 신심행위라는 수식어도 늘 붙어 다닌다.하지만 한국교회 성지순례 실태를 되짚어보면 쇄신, 보완해야할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 국내 순교성지를 순례하는 여정은 한국교회 고유의 순교영성을 매개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연례행사처럼 이어지는 ‘성지관광’식의 순례를 비롯해 무엇보다 한국교회 고유의 순교영성을 체득하는 노력도 부족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모든 종교인들은 ‘순례’라는 이름으로 성스러운 종교여행을 한다. 순례는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는 본질적인 현상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지순례는 단순히 진리를 추구하고, 정신적 풍요를 체험하고자 나서는 여정이 아니다.성지순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깊은 신앙의 표현이다. 이러한 참뜻을 올바로 알고 실천할 때, 한국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이상적인 영성인 순교영성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성지순례의 기원지구촌 곳곳에서 성지순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성지순례’라는 표현으로 시작됐는지 그 기원이 뚜렷하게 증명되진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유다교인들이 해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 수확한 곡식을 바치던 행위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진다.신약 시대에 들어서서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진 로마 순례가 보편화됐다. 또 8세기 즈음에는 성지순례가 신자들의 의무로 인식될 만큼 관습화돼 순례단이 조직되기도 했다.성서학자들은 교회 안에서 순례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닐 뿐 아니라, 동시에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영감을 받아 진행된 것이 많다고 설명한다. 또한 성지순례는 가톨릭신자들의 신앙생활의 쇄신과 내적 변화를 제공하는 기회로써 꾸준히 발전돼 왔다.■ 왜 순례를 하는가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자체가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여정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느님과 상의하기 위해, 축복받기 위해 순례를 이어갔다. 신약에 들어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들에 동참하기 위해 그 사건들이 일어났던 근원적인 장소들을 찾아가고자 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로는 속죄 차원에서 진행하는 순례가 일종의 신심 형태로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아울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회개의 행위, 성인에 대한 존경, 영적 은총을 받기 위한 실천 방법 등으로 성지순례의 폭을 넓혀왔다. 이러한 순례 역사는 그리스도교 영성 발전에도 풍요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왔다.특히 그리스도교의 경우 전통적으로 순례는 ‘회심의 여정’이라고 강조한다. 대부분의 순례는 깊은 영적 변화를 갈망하면서 자신의 내적 불완전함을 돌아보고,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포함내역 *왕복항공권/유류할증료*전일정 숙박비/차량비*여행지입장료/인천공항세/현지공항세*1억원 여행자보험*관광진흥개발기금(10,000원)/전쟁 보험료 불포함내역 1 인당 전 일정 70 USD의 가이드/기사 경비를 현지에서 지불해야 합니다.※ 15명 미만시 20~30달러의 추가 가이드/기사 경비 발생합니다.*개인적인 음료비용*호텔 객실 TIP 및 포터 이용시 포터비용*객실 TIP : 1$ 10~12장 준비하시면 편리합니다.☞ 환전안내 : 요르단 / 이스라엘 USD 달러 통용 됩니다. 매너팁은 소비자의 자율적 선택으로 지불여부에 따른 불이익은 없습니다. 상품소개 ☞ 2,000년 전 예수님이 계셨던 그 곳. 역사와 종교가 살아 숨쉬는【이스라엘】◈ 신비로운 바다 사해에서 부영 체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신 갈릴리 순례- 가버나움, 베드로 수위권교회, 오병이어기적교회, 팔복교회◈ 예수님이 첫번째로 기적을 베푸신 가나와 나사렛 순례- 가나 혼인잔치 기념교회, 마리아 수태고지 기념교회◈ 기독교 최고의 성지 예루살렘 순례- 감람산과 감람산 주변의 기념교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신 십자가의 길과 골고다 언덕, 예수님 무덤교회
    • 오피니언
    2021-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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