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6-1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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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3)
    3. 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교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300만 전도운동의 전초기지를 각 지역에 마련하기 위해서는 “2,800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 는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이 민족과 국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기치를 들고 나왔다. 이일을 위해서는 중심을 잡고 일하는 사역자가 요구되었다. 우선 70인의 전도 목사를 선정하여 전국에 파송하는 사역이었다. 이를 위해 신학교육을 받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은 사역자가 필요했다. 1948년 8월 서울 남대문 교회에서 야간 신학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그 야간신학교가 대한신학교로 그리고 안양대학으로 전이되기 이전의 연역을 요약한 것이다. 1948년 8월, 남대문 교회에서 야간 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윤필성 목사 취임. 1949년 1월, 서대문구 서소문의 새 건물로 이전하고 2대 교장에 김치선 박사 취임. 1950년 1월, 대한신학교로 개명. 1950년 5월, 제 1회 졸업생 18명을 배출. 1952년 9월, 4년제 각종 대학교로 인가 받음. 1956년 9월, 서울 중구 남산동 소재 교사로 이전. 1962년 3월, 서울 용산구 서계동(현 청파중앙교회) 교사로 이전. 1964년 4월, 학교법인 대한기독학원 인가 받음. 1966년 9월, 4대 교장에 김세창 박사 취임. 1968년 2월, 김치선 박사 별세(69세). 1969년 7월, 군종장교 후보생 지정학교로 인정 받음. 1977년 11월, 안양시에 15,000평 교지매입. 1980년 10월, 5대 교장에 이의완 박사 취임. 1985년 6월, 최순직 박사 학교 재단 이사장 권한대행 취임. 1985년 7월, 이형룡박사 교장 직무대행 시작. 이후에 학교는 빚에 시달리다가 채권단들에게 학교를 넘겨주게 되고 김세창 박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학교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채권단들은 당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당시의 천문학적인 빚 25억원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학교를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최순직 교수와 그분의 아내 되시는 김치선 박사의 둘째 딸 김동화 사모께서는 소나기처럼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께서 세우신 신학교를 자유주의 영역에 넘겨주다니... 하시며 넋을 잃고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대신교단이 설립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과정이 있다. 원래 대한신학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야간신학교로 출발하였다. 1948년은 한국교회사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신학교들에 관한 사건들이 일어난 해이다. 해방 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한 김재준 박사와 동정녀 탄생을 옹호한 박형룡 박사 사이에 일어난 두 신학자들의 갈등은 신학교의 분리는 물론 교단의 분리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서울 창동 교회에서는 1948년 5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총회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같은 해 대한신학교 모체인 총회신학교 야간신학교가 개설되었다.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 설립된 조선신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의 모체가 되었고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신학교가 되었다. 신학이란 이름으로 성경의존사상을 신앙하는 신학을 거역하는 묘하고 잡다한 단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한신학교가 자유주의자의 손에 넘어간 가장 기초적인 원인은 교회사적 정통주의 개혁파 신학을 강조한 최순직 교수를 대한신학교에서 배제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세창 박사는 대한신학교의 신학적 노선이 제기 될 때마다 항상 그분은 개혁파 신학에 대한 다른 의견을 개진하였다. 개혁이란 말을 꼭 근본주의에다 대입시켜 다른 견해를 첨가하였다. 같은 보수주의 노선인데 왜 개혁신학만을 강조 하느냐? 는 주장을 내세웠다. 최순직 교수는 가장 객관적인 교회사적 신앙고백에 의존하지 않고 김세창 박사가 무조건 부친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일방적인 근본주의에서 떠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최순직 교수는 김치선 박사의 공로와 당시의 김치선 박사가 처한 시대 상황을 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이해하면서 개혁파 신학으로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확정 시키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세창 박사는 무조건 아버지의 사상에만 집착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고 강의 시간마다 개혁주의라는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 다시 해방 후의 역사로 돌아가 보자. 1948년 5월 20일 조선신학교와의 갈등으로 창동교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총회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즉 자유주의와 절연하고 참다운 성경중심의 신학교를 세우자는 취지였다. 이 사건은 신학이 단순한 신학의 개념만을 의미하는 역사가 아니었다. 신학은 교회의 앞날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교단의 미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당시의 교수들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권세열, 겸임으로 한경직, 명신홍, 그리고 이자익 목사 등이었다. 그런데 1948년 같은 해 야간 신학교를 개설하게 된 것은 이미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의 독립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총신과의 갈등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간으로 운영하던 대한신학교는 김치선 박사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여 총신 본교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모이고 있었다. 졸업생들도 교회개척의 앞잡이가 되어 각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구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1957년을 계기로 하여 장로회 총회에서는 대한신학교를 장로회 총회신학교 야간부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기에서 김치선 박사는 “지금까지 여러 교파에서 보조를 조건으로 자기들의 교단신학교로 운영하자는 수많은 제안을 거절해 왔는데 이제 와서 총회신학교 야간부로 편입할 수 없다.” 고 생각하고 1957년 여름에 40일 작정기도에 들어갔다. 대한신학교는 김치선 박사의 생명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한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갈등이 증폭되어 갈 때 총회측에서 김치선 박사의 신학을 시비 걸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것은 개혁파 신학이 아니고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점이다. 당시 총신측에서도 다수의 목사들이 근본주의 사상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타인을 흠집 내기 위하여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타인의 흠집만을 들추어내는 사악한 일을 행한 것이다. 결국 대한신학교는 독립적으로 운영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적 배경도 없고 졸업생들은 총회에 가서 안수를 받고 사역지를 구할 수 있는 길이 막막했다. 더구나 당시 정부의 방침이 하달되었는데 하나의 신학교는 하나의 교단을 배경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근본주의를 강하게 추종하는 ICCC 총재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와 연관을 맺어 성경장로회라는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1961년 6월 21일 제 1회 창립총회를 열고 초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를 선출하게 되었다. 이후에 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교는 더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한신학교와 한양교회와의 갈등에 더하여 정부와의 소송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한양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김치선 박사는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2,500평의 땅을 취득하여 대한신학교를 같은 장소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교회는 교회대로 땅을 많이 차지하려고 하고 학교는 땅을 분할하여 양쪽이 똑 같이 차지하겠다는 충돌이 일어났다. 더불어 당시 정부의 방침은 그 땅에 KBS 서울 중앙방송국을 세우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당시 공보부 장관이었던 오재경씨는 기독교 장로로서, 그의 부친이 김치선 박사와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정부의 편을 들어 방송국을 세우겠다고 통보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국가에서 이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정부를 상대로 송사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양교회와 대한신학교는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하지도 못한 채 9년에 걸친 정부와의 소송에 일방적으로 밀려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때 ICCC 총재 맥킨다이어 박사의 도움으로 용산구 서계동 33-2, 구 쏘련 영사관 자리인 현재 청파 중앙교회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한 가지의 작은 인간적 갈등은 후에 극심한 분열을 일으킨 인류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신학적 사상은 더욱 그렇게 되어 온 교회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근본주의냐? 개혁파 신학이냐? 의 신학적 이슈는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에 있어 1970년대 이전에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신학적 이식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1970년대 이전에는 한국교회가 근본주의냐? 개혁파 신학이냐? 의 갈등이 없었고 서로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에 한국교회 안에 개혁파 신학이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무천년주의가 확산되고 언약론이 확대되고 또 다른 세력인 번영신앙이 기성 교외의 틀을 흔들기 시작하면서 신학적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제도는 장로교회로 신학은 개혁파로 교단의 정치와 대한신학교의 교리를 정립하려는 기치를 들고 나온 분이 최순직 목사였다. 이러한 기치를 정립하기위해 한 가지 정리해야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찾아온 ICCC와의 결별이었다. 최순직 목사는, 그분의 식구들은 물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계동33-2의 땅을 마련해 준 ICCC로부터 파송된 마두원(馬斗元, P.R. Malsbury) 선교사를 찾아가 그 땅의 원금을 갚았다. 그 돈은 학교를 잘 운영하여 조금씩 저축한 것이었다. 마두원 선교사는 그 원금을 받아들고 너무 기뻐하면서 “평생에 한국에 와서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제 대한신학교는 홀로 서는 길이 남아 있었다. 피눈물을 쏟아 대한신학교를 건설해온 김치선 박사, 최순직 교수, 그리고 그 주위의 인물들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대신의 신학이 좌경화 되어 안양대학으로 변질된 현 상황을 보고 땅을 치며 숨이 넘어갈 입장일 것이다. 우리는 개혁파 신학을 주장하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교수들의 견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신학의 변질을 막아야 한다. 그 신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는 신학교는 절대 성경의존주의 신학만을 중심으로 학교를 경영해야 한다. 신학 이외의 일반대학을 유치할 경우 신학이 좌경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미국의 하버드, 예일,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가 처음에는 아주 건실한 복음주의 신학을 기초로 하여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일반대학의 유치로 말미암아 신학이 좌경 되었다.” 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또 강조하기를 “그래서 지금 모든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들이 일반대학을 배제하고 신학대학원(Theological Seminary) 제도와 성경 대학(Bible College) 제도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 절대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하고, 교단의 정치를 배제하고, 그리고 일반대학 유치를 배제해야 올바른 신학을 유지할 수 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돌이켜 보면 안양대학이 과거 유럽과 미국의 자유화 된 신학교의 전철을 밟아왔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학의 변질은 보통 80년을 넘지 못하고 보수주의 신학이 퇴락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20기에 들어오면서 미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인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으로 인하여 곤욕을 치룬 후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들은 거의 모두가 교단의 정치적, 재정적, 그리고 연합이라는 명분을 버리고 단독적인 사설 신학의 경영을 유지해 오고 있다. 오직 신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미국의 보수주의 개혁파 신학교들은 100년이 넘어서는 현 시점에서도 신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으며 교회는 복고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순직 교수는 70년대 들어와 이제 대신은 대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대신의 황금시대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교단의 명칭도 대신으로 정정하여 명명했다. 이제 대신의 김치선 박사와 교단과의 문제를 잠간 언급해야 할 차례이다.
    • 오피니언
    • 특별기획
    2021-05-25
  • 신학이 없으면 교단은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님의 은혜과 평강이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 헌신을 다하셨던 원로목사님들과 애쓰시는 노회장님과 상임부서장님, 총회임원과 교단의 회원 목사님들 한 분, 한 분 위에 넘치게 부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코로나가 여전히 위협적이고 힘들게 합니다. 더 힘내시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큰 은혜로 회복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몇 가지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2월 27일 11시에 본 교단과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과 인준을 맺었습니다. 신학이 없으면 교단은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총회는 호서대학과 인준을 마치고 대학원 커리쿨럼중 교단사, 헌법, 정치, 신조 등을 우리 총회에서 위임하여 교육을 통해 후배를 양성할 수 있도록 위임받았습니다. 그 외 다른 대학과의 MOU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 총회는 우리 신학으로 후배를 양성하는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4-5년 후에는 알차고 멋지게 다져져서 대한민국에 교단을 이끄는 대단한 총회가 될 것입니다. 총회 실행위원회를 마치고 준비된 교회규칙과 헌법이 탈고를 했습니다. 2005년에 개정된 후 십여년 만입니다. 수고하신 법규위원장닙과 위원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단명칭을 대신호서로 정했습니다. 호서대학과 인준을 통해 극대화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인준협약서에도 몇 년후 변경할 수 있는 단서 조항도 있습니다. 마음의 서움함도 많으실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세대를 세워가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제거하기위한 방편으로 기억해주시고 잠시 묻어두고 미래를 보고 나가시지요, 봄 정기 노회에서 설명할 기회를 주시면 수립된 교단 발전계획을 참석해 직접 보고드리겠습니다. 교단 로고도 참신하게 제작되었습니다. 보시고 의견을 개진해주세요. 노회장 연석회의에서 결정하겠습니다. 교단 신문인 기독연합신보가 창간됩니다. 인터넷신문은 20일 지문신문은 23일 첫 창간호가 나옵니다. 많이 애독하시고, 기도해주시고 축하해주시길 바랍니다. 정오의 기도를 선포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교단과 한국교회와 이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대신 교단을 세우신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정오에 모든 일정을 미루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만 팔천 동리에 우물을 파 민족 복음화에 대한 열정과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고, 복음으로 세워 영적 부흥을 이루는 일들을 이제는 우리가 이어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총회 산하 모든 노회와 교회와 성도님들은 매일 정오 시간에 모든 일손을 놓고 5분간 같이 기도합시다. 이제 우리 교단은 이 위기를 넘어서 회복과 부흥을 향해 매진할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교단의 동역자 목사님과 온 성도는 회복을 위해 한마음으로 달려갑시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합시다. 반드시 하나님은 회복과 부흥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울 한해 우리 총회는 예수 정신이 가득한 온전한 공동체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정신으로 한 교회라도 더 개척하고, 미자립교회를 자립교회로 만들고, 교단의 교회들이 초대교회와 같이 부흥, 성장케 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합니다. 특별히 저를 위해 특별한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주 보고드리겠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강건하시어 더욱 진액이 풍족하시어 감람나무와 같은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1. 3. 12. 대한에수교장로회총회 총회장 강대석목사 드림.
    • 오피니언
    • 목회서신
    2021-03-21
  • [간증] 김의철 목사의 '목회는 영권이다'(1)
    목회는 고난의 연속이다. 많은 목회자가 바윗덩이처럼 묵직한 고난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주저앉는다. 문제를 합리화하거나 잘못을 성도나 외부 탓으로 돌린다. 미워하고 증오하며 원수를 갚으려 하면 목회는 더욱 어렵게 된다. 지난 35년간 목회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험난한 가시밭길에서 길어 올린 진리는, 고난의 압력을 이겨낼 힘은 오직 무릎 꿇고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목회자가 영권(靈權)을 가지려면 인본주의를 멀리하고 자신의 야망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2009년 인천 송도에 교회를 개척한 지 10년 만에 2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모였다. 11차례 ‘50일의 기적’ 기도회를 진행하며 전국 중소형교회에 영적 활력을 불어넣고 목회 희망을 제시하게 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1960년 경남 거제도 송진포리에서 태어나 7남 2녀, 9남매 중 일곱째로 자랐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보건소장을 지냈다. 광복 후엔 미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통역을 했고 6·25전쟁 때는 야전병원 원장으로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아버지는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고향 거제도에 정착했지만 가정적이지 못했다. 신앙생활도 게을리 했다. 어머니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신 마산 문창교회에서 훈련받았다. 매일 밤을 기도로 지새우곤 했다. 어린 나는 매일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내가 출석한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거제 송진교회였다. 초등학생 때 밤이 되면 교회 뒷동산에 올라가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과 별빛을 보며 세상을 비추는 목회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장목중학교 2학년 다닐 때 갑자기 교회에서 반주를 맡았다. 반주자가 도시로 떠난 것이다. “철아, 니가 반주해라.” 풍금을 만지고 놀던 나는 “예”하고 무조건 순종했다. 쉬운 찬송가 3곡을 골라 열심히 연습하니 기적같이 4부로 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주일날 발생했다. 어설프지만 연주가 가능한 3곡을 목사님께 드렸는데, 그만 다른 찬송을 부르시는 게 아닌가.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매일 풍금 연습을 했다. 1개월간 열심히 기도하며 연습했더니 놀랍게도 대부분의 찬송가를 칠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주일학교와 학생회 예배, 대예배 풍금연주를 도맡아 했다. 그러던 중 목사님이 외지로 나가시고 후임자로 당시 부산 고신대 신학생이었던 김철봉 전도사님이 주말마다 오셨다. 그분은 난생처음 보는 세계지도를 펼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철아, 니는 지금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에 살고 있지만 봐라, 세상 넓데이. 저 바다를 건너면 큰 도시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가면 다른 나라도 있데이. 너는 세계를 꿈꾸며 살아야 한데이.” 그때부터 나는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안타깝게도 김 전도사님은 신학교를 마친 뒤로는 거제도에 오시지 않았다. 외롭고 힘든 시간이 시작됐다. 청소년 시절 산과 바다밖에 없는 그곳에서 매일 밤 끝이 보이지 않는 적막감 가운데 울며 기도했다. 그곳에선 중·고등학교를 마치면 어부나 농부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 19세가 될 때까지 거제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을 정도로 낙후된 마을이었다. 공부를 마치면 산에 소를 풀어 놓고 소나무를 바라보며 내 맘대로 영어설교를 한다고 외쳤다. 비가 오는 날엔 한 손에 소고삐와 우산을 잡고, 한 손엔 영어단어장을 들고 공부했다. 그러나 내게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상가상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아, 어떻게 하면 신학교에 갈 수 있을까.’ 나무를 하러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면 풀밭에 주저앉아 주르르 눈물만 흘렸다. “하나님, 이 작은 자를 기억해 주이소. 목사가 되고 싶은데 길이 없다 아임미꺼.” 그렇게 한참을 기도하는데 나를 찾는 방송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오피니언
    2021-03-20
  • [특별기고] 코로나보다 강한 공동체
    코로나보다 강한 공동체 선교사로 나가기 직전 한참 목회에 열중하고 있을 때 2천년대를 전후해 한국교회에 봄바람처럼 찾아온 열풍이 가정교회였다. 필자가 소속된 노회에서도 당시 가정교회에 대해 매우 권위있다고 자타로 부터 인정받는 강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개최 했었다. 내 자신 그 때를 깃점으로 만 2년간 가정교회-목장교회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를 열심히 하던중 그야말로 무엇엔가 이끌리듯 중국으로 떠나게 된 경험이 있다. 15년의 중국사역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산동성 칭다오에 있는 청도한인교회를 7년이상 출석을 했었다. 선교사 신분이다보니 소규모의 교회보다는 규모있는 교회라야 목회자에게 부담이 안된다고 판단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큰교회를 선택하게 된다. 한국에서 2천년대 초부터 불어닥친 가정교회 바람이 2005년 부터는 중국의 한인교회에도 불어오게 되고 출석하던 교회도 2천년대 말부터 목장교회를 도입하였다. 사실 담임목사가 목장교회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대한 목회철학이 확실하다면 명칭이 가정이든 목장이든 공동체를 지향하는 목회는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청도한인교회는 그런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의 한인교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단체는 두날개였다. 두날개를 이끄는 대표는 청도한인 담임목사의 후배였는데, 아마도 후배가 이끄는 무브먼트라 자존심이 상했는지 미국 휴스턴한인교회 최영기목사의 가정교회에 교회 대표들을 보내 교육을 이수하게 한 후 전 교회를 가정교회 체제로 개편을 하였다. 당시 한인교회의 제직들은 대다수가 제조업체의 CEO아니면 무역회사 대표들이었는데, 전가족이 이주한 가정들도 있지만 30%정도는 남성만 사업차 현지에 상주하는 가정이었다. 카리스마가 강한 담임목사는 안수집사들을 모두 목자와 목녀로 세워 목장모임을 안수집사의 가정에서만 모이게 하였다. 문제는 매주 모임을 시작하기 전 전체 목원들이 모여 식사친교를 하는데 있었다. 보통 7~8명에서 많은 경우는 10명이상의 인원을 매주 식사대접 해야하는 안수집사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부담이었다. 목자를 맡고있는 안수집사회를 중심으로 목장모임에 대한 건의가 있었지만 담임목사는 자신의 넘치는 카리스마로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자연히 목장교회라는 담임목사의 목회방침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만 끓이던 안수집사들에게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원로목사에 대한 예우규정을 제정하는 규칙개정이었다. 통상 20년이상 연속으로 목회하고 은퇴를 할 때 결의를 통해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는다. 하지만 담임목사는 외국교회라는 점을 부각하여 15년이상 목회하고 은퇴하면 원로목사로 추대해 줄 것을 요구했고, 평소 가정교회 문제로 벙어리 냉가슴을 앓던 안수집사들을 중심으로 "절대반대"가 결의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교회는 결국 그렇게 시험에 들어 1년이상을 목사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첨예한 대결을 하게되고, 이러한 모습에 환멸을 느낀 신자들도 한가정 두가정 교회를 떠나기 시작해 교회는 반토막나고 말았다. 가정교회-목장교회가 지향하는 목회는 "공동체결속"이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재현하는 목회운동이다. 어쩌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적인 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결코 쉽지않다. 꿈같은 목회방식이다. 중국 공산정권이 1949년 부터 1972년 까지 채택한 공동생산 공동분배는 그들을 가난으로 부터 구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채택한 방식이 토지분배 정책이었다. 식구수대로 토지를 분배하여 마치 임대료를 지불하듯 일정액을 토지세로 납부하고 모두 자신들이 소유하는 방식을 채택하면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 목장교회-가정교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서로 돌아보아 형편을 살피며 기도하자는 것이다. "서로 돌아본다"는 목회정신은 매우 중요하다. 어려움에 처한 지체에게 돈보다 중요한 것은 합심기도이다. "두세 사람이"마음을 모아 기도를 할 때 우리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중국의 한인교회들 중에는 지역에 따라 중국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교회예배를 중지당하는 경우가 있다. 동기가 목회하는 광저우한인교회의 경우 거의 반년 가까이 예배모임이 중단된 때가 있었는데, 다행히 목장교회가 정착된 덕분에 교회는 흔들림없이 목장별 모임을 계속 이어가며 교회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며 위기를 극복한 사례가 있다. 중국정부는 중국 전체에서 겨우 몇개의 한인교회에게만 모임을 허락해주고 그외의 교회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통제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18일 모친상을 당했다. 코로나 시국이니 대다수는 계좌이체 부의금으로 문상하는 문화가 장착되다시피한 상황이다. 노회에서도 조위금으로 문상을 대체하고 있다. 더군다나 목회자가 아닌 선교사이다보니 문상객은 가까운 극소수의 친인척으로 한정되게 된다. 추천을 받은 근로복지 인천병원 장례식장에는 3개의 분향실이 있는데, 같은날 시차를 두고 안치하여 발인도 같은날 오전 6시반부터 1시간 간격으로 출발을 하였다. 1층은 목회자 가정이라 각지의 목회자들이 동참해 거창한 발인을 하였고 우리 옆방도 외동딸 가정임에도 출석하는 교회가 주도하여 결코 외롭지않은 발인을 하였다. 문제는 바로 우리 모친이었다. 자식이라고는 아들하나에 손자하나! 결국 셋이서 조촐한 발인예배를 드렸고, 운구할 사람도 모자라 장례식장 직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화장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시신을 영구차에서 시신보관소에 안치한 후 순번이 왔을 때 다시 소각로로 이동하기 위한 운구에서도 화장장 직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아마 이보다 처량한 장례식도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하였다. 공동체는 위대하다. 제아무리 코로나의 힘이 막대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공동체는 이기지 못한다. 문제는 담임목사의 공동체에 대한 목회철학이다. 공동체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에 달려있다. 과거처럼 교회부흥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한 공동체라면 오히려 부작용만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이라 초상집 문상을 꺼리는 사회관습 마저도 뛰어넘을 만큼의 결집력으로 뭉쳐진 공동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김용회선교사> - 대신35회 - 1986-2003 경안노회 중부교회 담임 - 1997 경안노회 3대 노회장역임 - 2003년 4월 주중선교사로 파송(만15년 사역)
    • 오피니언
    2021-03-20
  • [논평] 서울광장에서의 동성애 퀴어 행사는 중단되어야 한다
    서울시공무원 17인, 4.7 서울시장 후보자 입장 밝히라 성명 서울광장은 서울시민 모두의 것이며, 이를 사용함에는 서울광장 사용의 규칙에 반하여 논란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서울시에서는 2015년부터(당시 박원순 시장) 동성애 퀴어 행사를 허용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은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 박원순 시장은 동성애 퀴어 행사를 하도록 꾸준히 장소 사용을 허락하였다. 이에 시민들의 공복(公僕)인 서울시 공무원 17인은 지난 2019년 5월 서울광장에서의 퀴어 행사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하나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공직 사회에서 공직자로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데도 의견을 냈다는 점, 또 하나는 시민들의 마음을 담아서 분명한 공직자의 목소리를 낸 점이다. 그런데 2020년 4월 서울시 인권담당관 산하의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이하 서울시 인권위)에서는 의견을 낸 공직자들을 ‘성소수자의 인격과 존엄을 훼손하고 성소수자를 예외적 존재로 취급하도록 해서 차별·혐오 표현을 한 것으로 판단 한다’는 엉뚱한 결정을 내리고, 서울시장에게 <서울특별시 공무원 복무 조례>까지 개정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해당 공무원들은 이 결정에 대하여 서울시장과 서울시 인권위원장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청구한 상태이다. 이들은 누구를 혐오하고 차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퀴어 행사는 음란한 행위였고, 이런 모습은 서울광장 사용의 규칙에 위반된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시 인권위가 이들을 혐오와 차별자로 몰아간 것은 언어도단이다. 한마디로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압력이다. 서울시에서 일어나는 것을 현장에서 가장 잘 알고, 그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이런 식으로 차별과 혐오로 몰아가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울시 인권위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을 위한다기보다 이미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시민들의 보편적인 인식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차별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는 상태이다. 그러함에도 서울시 인권위가 이런 결정과 압력을 넣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본다. 행정소송에 대한 변론기일은 4월 1일로 잡혀 있는데, 이번 결정에 따라 공직자들의 정당한 의사 표현이 제대로 반영되느냐, 아니면 차별에 관한 법률도 없는데, 우격다짐 식으로 동성애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이들 17인의 공직자들은 이번 4.7 보궐 선거에서 서울시장이 될 후보자들도 객관적, 보편적, 건전성이 떨어져 논란이 많은 동성애 퀴어 행사를 서울광장에서 행하는 것을 허용할 것인지, 분명히 밝히라고 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고, 악한 문화 권력들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을 원하는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와 가치관을 몰아내고 있는 고약한 형국이다. 차기 서울시장이 누가 되든지, 국민들의 정서와 가치관에 맞는 시정(市政)을 펼쳐야 한다. 직전의 고 박원순 시장처럼, 대다수 시민들이 원하지도 않는 동성애 퀴어 행사를 허락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 오피니언
    2021-03-20
  • [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2)
    2. 김치선 박사의 신학적 배경 김치선 박사의 신학을 정의하는 여러 목소리들을 감지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객관적 배경을 무시하고 상당히 주관적 평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첸 박사의 수제자, 정통 개혁파 신학자, 그리고 가장 보수적인 신학의 근본주의자. 등등의 평가이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신학적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분은 1970년대 대한신학교의 개혁파 신학의 흐름을 주도한 김치선 박사의 둘째 사위 최순직 교수와 그의 아들 김세창 박사의 견해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분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김치선 박사를 모셨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김치선 박사가 근본주의 신학을 표방하였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개혁파 신학을 부분 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분들이 그러한 공통점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또 다른 갈등의 요소를 표출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무조건 부친의 근본주의 신학을 수용하려는 김세창 박사와 교회사적 개혁파 신학을 수용해야 지속적이며 객관적인 신학을 수립할 수 있다는 최순직 교수와의 신학적 갈등이 저변에 숨어 있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중요한 언급이 있다. 안양대학의 신학적 변질을 분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1975년 최순직 교수가 연구차 미국에 들렀을 때를 이용하여 김세창 박사는 비개혁파 교직원들을 대한신학교에 배치하여 버렸다. 그 후로 신학교 내에서의 갈등은 심화되어 각 주장하는 부류마다 자기들만 옳다 하여 잠잠한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한편으로 김세창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한국 최고의 종합대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대한 꿈을 외치고 다녔다. 어느 국가이든 또는 단체이든 내부에서 혼란스런 일이 발생할 때는 힘을 발휘하는 곳으로 사람들이 쏠리게 되어있다. 그 힘의 원천은 사람들의 조직, 경제적 실권, 그리고 정치적 우위 등이다. 결국 대한신학교는 경제적 힘과 교육부의 배경을 바탕으로 종합대학이 되어 안양대학으로 변해 버렸고 보수주의 신학은 자취를 감추어 가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어떤 분은 개혁파 신학도 근본주의 신학도 보수주의 신학인데 서로가 공통분포를 형성할 수 없다는 말인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두 부류의 신학은 보수주의 신학으로 명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 현미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본주의 신학은 너무나 단순하고 지엽적인 신학에 한정되어 있다. 그 신학의 주제는 성경의 무오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육체적 재림이다. 이 5가지 신학의 주제는 19세기 유럽의 고등비평주의와 종교혼합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의 반동으로 일어난 교리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다섯 가지를 따로 분류하여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신학적으로 절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이 주장하는 신론, 인간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엽적인 신학을 강조하게 될 때 그 신학이 불원간에 주관화 되어 자유주의로 기울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세기 초엽 근본주의 운동의 뿌리가 되었던 5가지 교리는 1930년대 들어와 절정을 이룬 후 1950년대에 들어와 신근본주의(Neo Fundamentalism) 운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신근본주의 운동이란 강한 주관적인 입장과 더불어 성경의 문자주의를 내세우며 분리주의에 열을 올리는 운동이었다. 근본주의의 극단적인 주관주의 신학운동은 1948년에 WCC를 강력 대항하기 위해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를 중심으로 ICCC를 조직함으로 시작되었다. WCC를 대항하는 운동은 잘 한 일이나 ICCC 단체 이외의 어떤 보수주의 신학은 물론 개혁파 신학까지도 정죄해 버리는 분리적인 일에만 피켓을 들고 나온 운동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지엽적인 신학 운동은 결국 신복음주의로 떨어져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신학계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근본주의의 두 가지 신학적 문제점을 발췌해 보면세대주의적 요소와 일반은총론의 배격이다. 세대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달비(John Darby)와 20세기 초 스코필드(Cyrus Scofield)에 의해 시한부적 전천년주의를 강하게 강조하는 역사적 종말론의 신학이다. 계시록 20장의 천년 기간을 문자적으로 보고 일반 역사와 구별된 획기적인 기간으로 인정하는 신학적 입장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신학적 입장은 일반은총의 배격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그리고 과학 분야를 세상의 일로 취급하고 죄악시 하는 경향성을 드러내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 사상이다. 즉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영역과 사탄의 영역을 대립적인 관계로만 취급한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탄의 영역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응용하시는 허용적 섭리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1920년대 당시의 미국 보수주의 운동은 웨슬리안적 보수주의, 개혁파적 보수주의, 그리고 기타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의 총 집합체를 형성하여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 대항의 원인은 자유주의자들이 제공했다. 그 자유주의자들은 당시 말도 되지 않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고 나왔다. 상식 이하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신학을 주장하며 성경을 난도질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극단적인 성경 배타주의를 역공하기 위해 미국의 복음적 요소를 소유하고 있는 교회들이 하나의 집합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그 대응전략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신학적 입장인데 하나는, 종말론에 대한 강렬한 신학적 입장과 또 하나는, 합리적이며 과학적 입장을 공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반은총에 대한 배격이 발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많은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온 시기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이었다. 너구나 이러한 근본주의 사상이 가장 활발하게 성행하였던 1930년대 김치선 박사께서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하나의 비화를 소개하면 김치선 박사는 그분의 딸이 교회 행사에 참여하여 율동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너는 잡년이다.” 라는 말을 하셨다는 사건은 그분이 얼마나 일반은총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김치선 박사가 병중에 눕게 되어 오래 동안 침대의 신제를 면치 못하게 되었을 때 온 가족들에게도 TV를 시청하지 못하게 하시다가 너무 무료한 나머지 TV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일화는 그분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저술한 구약사기(The History of the Old Testament)를 살펴보면 구약 역사의 시대적 분류법이 언약론이나 하나님의 주권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 세대주의적인 요소가 깊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나타난 구약의 인물들과 사건들의 발췌는 구약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신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물론 처음 신앙의 세계에 들어온 초 신자라도 그 깊이와 넓이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유효한 저서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냉정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시대의 아들임을 벗어날 수 없다. 1920년대 이후 당시 미국에서는 개혁파 신학의 영역에 속해있는 자들은 물론 웨슬리안주의적 복음주의 자들까지 합세하여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교리적 전쟁을 하는 시기였다. 5가지 신학적 이슈(성경의 오류 주장, 동정녀 탄생 부정, 대속적 죽음 부정, 부활 부정, 그리고 육체적 재림 부정)를 들고 나온 자유주의자들과 교리적 전쟁을 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이 때 김치선 박사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연히 당시의 사상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와 1914년 이후 30년 어간에 세계 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치렀던 세계는 온통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피안을 세계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천년왕국설이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특히 당시 한국교회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거의 근본주의적 천년설을 주장하는 분들이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사경회에 참석하면 거의 모든 강사들이 역사적 종말론에 있어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를 설파하는 설교를 들었다. 오늘날의 신학적 입장을 고려해 볼 때 보수주의 영역 안에서 역사적 전천년주의, 후천년주의적 육체적 재림론, 그리고 무천년주의적 재림론 등이 상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시대적 아들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교회론에 있어 당시의 로마 캐톨릭과 제왕들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정교하게 정립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대입해 보면 너무나 원시적인 신학의 피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칼빈의 신학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당시 엄두도 낼 수 없는 정교분리를 주창하고 나선 일은 그 천재성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그가 남김 업적은 너무나 지대하다. 당시의 근본주의 운동과 한국의 정세로 볼 때 하나님을 신앙하는 민족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실행하는 운동이었다. 매 맞고, 투옥되고, 그리고 가족이 흩어짐을 당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운동이었다. 그런 면에서 김치선 박사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개혁파 신학의 정통성을 유지해야 미래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신앙적 유산을 남겨줄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성장에 있어 월등한 방법론이나 특별한 사회적 이슈를 적용하면 일시적 부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남겨놓은 교회사적 신앙고백의 노선을 버리게 되면 언제인가는 교회가 타락의 길을 면지 못하다는 것이 역사의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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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2021-03-20
  • [칼럼] 설교 100배로 잘 듣기
    교회가 되려면 두가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설교자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설교를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가 있어야 한다. 교회로서 최악의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설교자, 설교자의 말은 사람의 말로 듣는 청중이 있는 교회이다. 예수님이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 9)고 말씀하시고, 이 말씀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각 말미에서 반복하신 것(2-3장)은, 자기 백성들이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을 기대하신다. 말씀을 들으므로 "복있도다"라고 확신시켜 주신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라"(눅10:16).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반대로 그분의 말씀 전하는 설교자를 배척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짓이다. "전파하는 자가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왜 설교를 듣는 일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써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듣지 않는다거나 그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불경건이다. 인류를 죄와 비참에 떨어지게 한 것도 말씀을 구체적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대신 사탄의 말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니면 사탄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과가 결정된다. 회개와 믿음 그리고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신다. 에덴 동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아니었다. 듣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절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생각을 좇아 자기 길을 걸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든지 완악하게 하든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모든 사람은 말씀이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해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주목하게 하고자 하실 때 "이스라엘아 들으라"(신5:1; 6:4; 9:1)고 외치셨다. 죄인들은 듣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설교자들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해리 아이언사이드(Harry Ironside)가 자기는 설교하는 은사를 받았지만 회중들은 듣는 은사를 받지 못한 것 같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설교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만큼 중요하다면, 설교를 가볍게 생각하고 경멸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신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기를 배우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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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칼럼
    2021-03-20
  • [특별기고] 교단의 정체성
    우리 교단은 자생적 교단이다. 설립하신 김치선목사님의 목회철학과 신학정신이 한국교회 교계 속에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남겨진 우리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든 틀을 재정비하고 새롭게 세워나가기를 소원한다. 1. 개척정신: 가서 우물을 파라 김치선 박사는 우리나라가 진정한 민주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변화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에게 ‘2만8천 동리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 있는 교회 수는 3,000 교회가 안 되었다. 더욱이 한 교단에 하나씩만 신학교를 허용했기 때문에 총회에서는 떳떳한 총회신학교가 있다며 대한신학교를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졸업을 해도 마땅히 사역할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삼은 김치선박사는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에게 일할 수 있는 교회가 없으면 도리어 전국 방방곡곡에 나아가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라고 가르쳤다. 전국 2만8천 동네에 교회를 세워 이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는 이 민족의 십 분의 일이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결심하여 삼백만 부흥전도회를 결성하였다. 70인의 전도목사들을 전국에 파송하여 큰 역사를 시작하셨는데 그 중에는 박재봉목사, 이성봉목사, 손양원목사등이 있었다. 이 운동은 6·25전쟁이 일어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렇듯 구령의 열정 그리고 개척과 도전정신으로 대신 교단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교단 등이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그 이전에 있던 교회들의 분열을 통하여 교단이 구성되었던 반면에 교단은 순전히 졸업생들이 개척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 설립하고 그 교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의 힘으로,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생교단이다. 이러한 개척정신은 앞으로도 우리 교단의 정체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 편한 길을 쫓는 시대적 상황을 따를 것이 아니라 주님 부르신 그곳이라면 영적 야성을 가지고 나아가는 대신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발자취를 보여주었던 믿음의 선배들과 달리 현재 교회들마다 믿음의 야성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들을 때가 있다. 무엇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가졌던 야성을 사라지게 할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영혼구원에 대한 무관심이 신앙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영혼구원에 대한 무관심이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우리의 관심과 생각을 변질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생각이 주님과 멀어지고 있다. 교회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영혼을 향한 갈망이 있는가? 외적 풍요로움과는 대조적으로 내적으로는 빈곤함을 호소하는 주변의 영혼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외적 자유로움과는 대조적으로 내적으로는 결박된 채로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주변의 영혼들의 영적 상태에 얼마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의 본질은 영혼구원에 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앞장서는 것이 교회의 비전이며 목적이다. 우리의 모든 사역은 영혼구원이라는 목적에 기반 되어져야 한다. 희망도 소망도 없던 이 땅 가운데 구령의 열정과 개척정신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하여 우리 교단은 만들어졌으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제 지금 우리를 통하여 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기를 고대한다. 다시 우리 대신인의 중심 가운데 ‘2만8천 동리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간절한 구령의 열정과 개척정신 그리고 도전정신이 샘솟기를 바란다. 믿음의 야성을 가지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 데에 앞장서는 교단이 되기를 고대한다. 2. 애국정신: 한국의 예레미야 김치선박사는 당시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리셨다. 설교와 강의 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항상 눈물로 호소하셨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나라가 망해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앞장섰다. 21살에 학생대표로 함흥의 영생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3·1운동을 준비하다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1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유학을 마치고 일본 동경에서 신숙중앙교회 사역을 할 때에 일본이 조선인을 내선일체라 하면서 조선인교회를 구속하기 시작했다. 조선사람도 내선일체이니 교회에서는 일본말로 설교해야한다는 것이었는데, 교회의 중직자중 한사람이 김치선박사가 조선말로 설교했다고 신고를 하여 수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와 남대문교회로 부임하셨을 때에 그 무섭고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매일 새벽마다 강단에 엎드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한없이 우셨다. 그리고 해방되었을 때에 신앙의 자유로 인하여 강단에 설 때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 그는 일제하에서는 나라와 민족의 서러움으로 우셨고 해방 후에는 기뻐서 우셨고 망해가는 심령을 위해서 우셨다. 그는 새벽마다 해방의 기쁨과 우리 민족을 향한 구원의 문제, 특히 한국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눈물로 부르짖었다. 그는 민족과 나라 사랑의 길은 복음전파를 통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한국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3천만명이었는데 우리 민족의 십 분의 일인 3백만명을 하나님께 바치자는,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기 위하여 2만8천동네에 교회를 세워질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하셨다. 김치선 박사가 보여주었던 들끓는 나라 사랑은 우리 대신인들이 품어야 할 고귀한 정신이 되어야 한다. 이 땅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되도록 끊임없는 기도와 때로는 적극적인 신앙고백을 통하여 나아가야 한다. 정교(政敎)분리라는 용어의 왜곡은 거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무관심이 곧 경건이라는 등식으로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정교분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치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이원칙은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받았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신대륙으로 건너가 국가를 세운 청교도들이 이런 종교 박해가 신대륙에서도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한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상당수의 교회와 교단들이 민족과 나라 문제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너무나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를 비난하거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도 끊임없이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통치자들에게 그 시대 시대마다 영적지도자들이 통치자와 권세자, 사람들 앞에서 신앙의 목소리를 내었던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통치자들이 올바른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한다. 하지만, 목사에게는 제사장직도 있지만 선지자직도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시대적 상황을 읽으며 때로는 하나님 주권을 훼손하려는 본격적인 움직임들에 대해서는 기도를 넘어서 신앙고백을 통하여 목소리를 낼 줄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 믿음의 선진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영적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만 하지 않았다. 학생대표로서 참여했던 김치선박사 뿐만 아니라 3.1운동을 주도한 지도자의 상당수가 목사였으며, 그리스도인이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일제의 만행에 맞선 분명한 목소리와 구별된 믿음의 행동을 보였다. 그런데 그 비슷한 시기 독일 내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나라를 향하여 그 어떤 신앙고백을 통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영적지도자들은 히틀러의 만행 앞에 침묵했다. 그들이 분명 기도했을지 모르지만, 기도에 따른 분명한 목소리와 구별된 믿음의 행동 등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끔찍한 역사를 남겼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의 한구석 구석에서 빛을 내고 맛을 내어야 한다. 사회 각 영역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신앙고백을 통하여 세상이 추구하는 인간중심적인 생각의 위험성에 대하여 알려줄 사명이 있다. 세상 가운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정치라고 한다면 신앙고백을 통한 정치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사명이다. 지금 우리는 유럽을 필두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들을 보게 된다. 그 나라 안에 하나님 주권이 완전히 무너지고 국민 주권의 목소리가 대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성경적 가치들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 할 때 교회지도자들은 아무런 반대도 할 수 없었고 지지해버렸다. 그로 인해 유럽에서는 부부가 아이에게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교육을 했다가 양육권을 박탈당하거나, 노방전도를 했다고 고발당해 체포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이 진노할 가슴 아픈 일들이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가고 있음에도 그 누구 하나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각 영역에서 신앙고백을 통한 정치참여를 반드시 해야 한다. 국가가 본래의 목적인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선한 도구가 되도록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기준은 성경이다. 이 성경을 통해 나의 생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정치에 참여하는 태도 등이 결정되어야 한다. 작은 부분부터 민감한 주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기준은 성경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와 신앙이 이원론적이라는데 있다. 우리 안에 신앙과 정치를 각각 개별적으로 가져가려는 모순점이 있다. 올바른 성경해석을 통한 기독교 세계관과 그 관점으로 해석된 정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영향받은 가정, 지역, 학연 등에서 파생된 생각들로 여전히 정치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지향하는 정당의 목소리 가운데 분명 성경적이지 않은 목소리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함에도 신앙과 별개로 무조건적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특정인을 지지하는 일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명백히 금하고 있는 낙태, 간음, 동성애, 무신론, 유물론 등을 지지하거나 정책적으로 실행하려는 정당과 정치인은, 자신이 지지하고 좋아했던 자라고 해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세울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평소에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라고 해도 그가 명백하게 성경과 반대되는 주장을 하려고 한다면 무조건 그 정당과 정치인을 따를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도리어 그에게 무조건적 지지가 아닌 비판적 목소리도 낼 줄 알아야 한다. 목회자는 때로는 정치적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모습을 줄 수 있는 발언이라고 해도 그것이 성경적 가르침에 부합한다면 바른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소신 있게 성경적 가르침을 분명히 말씀해주는 목회자가 목회자지, 사람의 눈치를 보고 권력의 눈치를 보고 바른 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목회자이겠는가? 정치는 중요하다. 내가 선택하고 다수가 선택한 통치자가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정치에 더 이상 무관심하거나 한쪽으로만 편향된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통치자들을 끊임없이 예의주시하여 그들의 하고자 하는 정책들과 방향들이 하나님 주권과 상충된다면 때로는 한 목소리를 내어서 하나님의 눈치는 보지 않을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교회 공동체의 눈치라도 보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대신인이 가져야 할 나라와 민족을 향한 애국정신이라 하겠다. 3. 기도운동: 이 민족 삼천만 김치선목사는 남대문교회에 부임하면서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는데 기도 때마다 ‘이 민족 삼천만’이라고 외치면서 민족을 향한 기도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대문교회로부터 시작한 이 새벽기도의 물결은 전국교회로 확산하게 되었고, 새벽기도가 한국교회의 독특한 예배양식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전쟁 후 삼각산에 기도원만 있던 시절에 성도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기도원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현재 서울대 기숙사 자리에 벧엘기도원을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대형천막을 치고 집회를 하다가 산을 깎고 기도원에 올라온 모든 사람들이 강에서 돌을 운반하여 하나하나 쌓아 올려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예배당 건축 이후 수많은 성도들이 모였고, 많은 성도들이 밤을 새면서 기도함으로 산에는 성도들의 기도 소리가 밤새 울려 퍼졌다. 그 기도의 흐름이 우리 신학교 다닐때도 주경야독하며 매주 목요일 저녁 강의가 끝나면 가짜 제일교회에서 내어준 버스를 타고 삼각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하지 않았던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물려주었던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등의 기도에 힘쓰던 모습들과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알리었던 모습들이 상당부분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도 시대가 바뀌었는데 꼭 그렇게 티 나고 유별나게 기도에 힘쓸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들과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조용하고 고상하게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생각들이 알게 모르게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보이게는 과도하다고 생각이 드는 그 행위들이 시대의 한 획을 그었던 위대한 믿음의 액션들이 되었음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에 힘썼던 과도하고도 무모한 그 행위가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많은 영혼을 건지는 한 획을 그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풍요로운 삶과 달리 빈곤한 기도로 일관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할 때에 다시 기도의 풍요가 우리 교단을 통하여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김치선박사가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세우기 위하여 눈물 흘렸던 그 기도가 바로 우리를 통하여 다시 시작되기를 바란다. 4. 대신이 나아갈 길: 회복과 화합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기독교인들이 밀려오고 있었고 평양신학교를 다니던 신학생들도 있었다. 이 때에 김치선박사는 신학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게 되고 1948년 남대문교회에서 야간 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대한신학교의 전신이다. 그 후 장로교 총회신학교에 파벌싸움이 일기 시작할 때에 1961년 김치선박사는 세계 기독교 보수계인 I.C.C.C의 메킨 타이어와 손을 잡고 성경장로회를 조직하여,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대신 교단으로서 출발하였다. 그러던 중 1968년 김치선박사가 소천 후 신학교운영문제와 성경장로회가 분리되어 나가는 일이 발생하였지만,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남은 40여개 교회를 필두로 대신교단은 도약하게 되었다. 그랬던 우리 교단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분열과 반목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예장백석과 추진했던 통합이 끝없는 갈등 속에 실패로 돌아간 이후 현재 대신수호측, 백석대신측, 예장대신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자랑스런 자생교단으로서 대신교단이 가졌던 정체성과 가치들이 훼손되는 시점에 와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일 수 있다. 다시 우리 교단은 정체성을 굳건히 하고 잘못되었던 병폐와 폐단을 회복하고 변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볼 수도 있다. 대신이라는 이름보다 김치선목사님의 목회철학과 신학정신이 한국교회 교계 속에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남겨진 우리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든 틀을 재정비하고 새롭게 세워나가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2021-03-20
  • [기획특집] 신영지주의를 경계하라
    이 시대의 교회나 크리스천들을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이다. 영지주의의 간단한 정의는 타락한 형태의 교의를 가진 한 이단사상으로만 판단하는 데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심각한 이단사상이다. 우리는 구원을 믿음(faith)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지만 영지주의는 앎(Gnosis)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좀 더 자세하게 접근한다면 앎으로, 사람의 기원이 신성에 있음을 알고, 이 깨달음을 통해 사람의 구성 중 영적요소인 영혼은 물질세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 영향으로 기독론에서 있어서도 정통진리와는 완전히 다르게 주장하는데 예수는 단순한 메시아로 화신하여 나타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해 우리는 엄격하게 정죄 또는 배격 한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 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언제부터인가 영지주의의 현상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 우려된다. 영지주의 사상의 적용은 이렇다.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하는데 심지어 하나님은 물질세계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며 악은 물질에서 나왔기에 하나님은 물질세계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 산물이 이원론적 사고가 나오게 되어 구원도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킨 결과 금욕주의 아니면 자유방임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주의 사상이 영지주의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오늘날 영적지형도를 볼 때에 신 영지주의(新 靈智主義)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가 많다. 구원은 분명 믿음을 통해서만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구원을 가져오기에 다른 조건을 첨가하게 되면 다른 복음이 된다는 것이 절대 진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절대 진리를 적용하여 요구되는 믿음의 현상과 열매와는 사뭇 괴리감이 있게 되어버린 현실이 영지주의 현상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두렵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신 영지주의라고 정의하고 싶은데 안타까운 영적 현실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자유방종이다. 음주나 흡연, 도박, 마약, 동성애, 폭력, 범법 등 기타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개인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점점 합리화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갈 5:13) 둘째, 행함의 신앙생활을 부정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신앙행위를 우리는 목숨처럼 알고 지켜왔다. 주일성수를 비롯한 십일조 생활이나 헌신의 삶을 한국교회가 강조하며 지켜왔다. 이제는 어떤 것이든 강조를 하면 율법주의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하셨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약 2:22). 셋째, 천국에서의 부활영생을 잊고 산다. 막연한 천국이 아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입고 오신 성자이셨으며, 그 육체가 부활의 육체가 되셔서 승천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절대 소망은 우리의 부활 이후의 영원한 천국의 삶 즉 부활영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나 교계도,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가치관과 행위들이 오로지 이 땅이 절대 영원한 소망인 것처럼 보이는 삶의 가치관이나 삶의 모습들이 두렵다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전무후무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말자. 반대로 냉정하게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를 깊이 묵상하며 회개하자. 부디 신 영지주의 현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 오피니언
    2021-03-20
  • [기획특집] 고봉 김치선
    김치선 박사는 1899년 8월 10일 김영준씨와 최현숙 여사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8년 2월 24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김치선 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쉼을 누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김치선이 남대문교회에서 어떠한 사역을 하였으며,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김치선이 선택했던 결정과 복음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박태선과의 관계를 갖게 되는 과정과, 김치선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재일교포를 위하여 어떠한 선교사역을 하였는지를 살펴보려한다. 제 1장 남대문교회와 김치선 목사1944년 5월 일본에서 돌아온 김치선 목사는 서울에 있는 남대문교회의 제 6 대 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 당시 남대문 교회는 교통이 원활한 서울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갈리기 전에 전국에서 영락교회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였다.이승만 대통령과 김구선생이 자주 출석하기도 했다. 손양원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시고 300만 구령운동을 남대문 교회를 중심으로 일으켰다. 김치선 목사님은 부임하면서부터 새벽기도회를 계속하였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였다. 김치선 목사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신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었는데 김치선 목사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이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김치선 목사는 그 암담하고 어수선한 시기에 매일 새벽제단을 쌓으며 강단에서 엎드려 민족을 위하여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매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때부터 그를 조국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렀다.김구 선생은, 김치선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던 남대문 교회의 교인이었다. 따라서 김구 선생과 김치선 박사는 각별한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선생은 매 주 한 번씩 김치선 박사를 집으로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김치선 목사와 신앙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또 그의 아들 김신(金信)씨의 결혼식 때에도 그 주례를 김치선 목사에게 부탁하였다.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 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해방된 기쁨의 눈물, 자기 과거에 대한 회개의 눈물, 우리 민족을 향한 구원의 문제, 한국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남대문교회는 귀환 동포들의 안식처이자 소식이 끊어진 친지들의 행방을 알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역에서 내려 찾아드는 그들에게 교회는 뜨락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삼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이만팔천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그의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박태선장로와의 관계는 그의 지도력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하였다. 1. 삼백만 부흥운동의 전개 1907년 대부흥의 물결이 2-3년 지나자, 부흥의 열기가 차차 식기 시작하면서 교인들의 열성이 기울기 시작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일제가 기왕에 시작하였던 한국 식민지화를 가속화하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한국을 강점 병합하여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따른 사회의 불안과 모든 사람들의 좌절을 보면서, 교회는 이런 때에 낙담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을 일깨우면서 교회의 부흥운동을 재개하게 되었는데, 이 운동이 곧 100만명 구령운동이었다. 1909년부터 1910년간에 백만명 구령운동 (Million Souls Movement)이 전개된 일이 있었다. 백만명 구령운동은 1909년에 개성에서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 (M. B. Stokes), 갬불 (F. K. Gamble), 리이드 (Miss W. T. Reid) 등 3인이 다시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당기기 위해 사경회와 기도회를 한 주간 동안 갖기도 하고, 한국 교인 몇 사람과 함께 산상기도회를 개최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도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은 1909년 9월에 개최되었던 남감리교회 연차대회에 참석하여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하는 표어를 채택하도록 요청하여, 이 표어가 채택되었다. 이 연차대회가 폐회한 후 바로 열렸던 복음주의 선교연합공의회 (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위의 3인 선교사들은 이 공의회의 전도 목표를 채택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백만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100만명 구령운동”이 정식으로 출범을 하게 된 것이다. 1910년 선천에서 모인 장로회 제 4회 독노회에서도 100만명 구령운동에 적극 참여키로 의결하고, 7대리회에서 특별위원을 선정하여 이 일을 추진하게 하였으니, 이날이 한국이 일제에 병합된 지 꼭 20일이 지난 때였다. 이 운동은 한국에서 전도를 위해 남녀노소, 신자들과 학생, 평신도와 교역자들이 전심전력하여 이 표어의 구현에 노력한 전국적인 운동이었다. 전국의 각 교회가 연합하여 백만명전도회를 조직하고 각 지역 교회의 유력한 교역자들이 먼저 서울에 모여 1개월간 시내 전역에 축호전도를 함으로써 귀도자가 많았고 이로부터 전국 각지를 분담하여 계속 전도함으로써 많은 수확을 얻었다. 김치선 목사가 백만명전도운동에 영향을 받아서 삼백만 부흥 운동을 일으키던 때는 1946년이었다. 해방 이후의 정치적인 혼돈기였다. 당시 남북한 전체인의 인구가 3천만이었으므로 십일조에 해당하는 3백만이라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보자는 취지 아래 삼백만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 달에 한번씩 초청 강사의 부흥회를 가졌는데 박재봉, 손양원, 배은희, 김인서 등을 강사로 하여 금식과 철야기도 운동을 벌였다 (배명준 목사와의 대담, 1978년 8월 19일 재인용). 삼백만 부흥운동을 시작할 때 세 가지 중점목표를 가지고 진행되었는데 첫째 성령운동, 둘째 말씀운동, 셋째 회개운동이다. 당시 남대문교회 주일 학교는 교사 김성섭, 이의환, 김영정, 박동윤 등이 인도하였는데, 어린이 전도대원들은 북을 치고 나발을 불며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가 서울역 앞과 공원에 모인 군중들에게 복음을 외치면서 전도지를 배포하였다. 청년들로 구성된 전도대원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공창지역인 묵정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공창 폐지를 외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 곳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1950년 5월 중순 6.25가 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남대문교회 청년들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대한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삼 백만 부흥운동의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약 70여명의 전도대원들은 당시 공산당들의 출몰이 잦았던 38선 접경지대와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인하여 패잔병 공비들이 있던 지리산 지역과 제주도 한라산 일대에 복음전파의 사명감을 갖고 전도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전도대원들은 6.25로 인하여 대부분 선교지에서 순교를 당해야 했고 지금도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들 결사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의환 목사의 경우 6월 상순경에 38선 지구에 파송을 받았다. 개성지구, 연백지구, 옹진지구로 3조가 파송되었는데 마지막에 옹진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는 개성으로 가서 전도집회를 일주일간 갖게 되었다. 낮에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며 노방전도를 하였는데 시장에 가서 전도지를 뿌리면서 전도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전방 참호 속에 들어가서 대북방송을 하기도 하였는데 전도 설교를 하면서 찬송을 부르기도 하면서 흘러간 노래들을 불러주기도 하였다. 또한 군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에게 전도하였다. (이의환 목사의 증언, 기독교 방송 “한국의 교회”에서 방송, 1979년 1월 28일). 이들 전도대원의 가슴속에는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서로 반목질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으며 어서 속히 복음을 하나가 되어야 되겠다는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후 1962년에 이르러 삼백만 부흥운동의 결사대로 공비들이 출몰하던 지리산 지역에 파송받았던 대원 중 정관백 전도사가 공산군에 의하여 순교하였음이 밝혀져 남대문교회가 지리산 지역인 구례군 산동면에 비석을 세워 그를 기념하였다. (1962년 11월 21일 당회록). 산동교회의 사연은 너무나 처절한데 일명 과부교회로 불리우리 만치 동란을 겪는 동안 교회의 남자는 모두 목숨을 잃어 버렸다. 그리하여 여자의 손으로 나무를 찍어다가 예배당을 지었는데 남자라고는 60세가 넘은 영수 한 사람 마저 건축자재를 사서 싣고 가다가 소달구지가 뒤집혀 죽고 말았다. 이곳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산불’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여인들만이 사는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이 곳에서 염명수 목사가 고아원과 자모원을 하였다. (배명준 목사와의 면담, 1979년 8월 19일). 채기은은 삼백만 부흥운동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해방 후 민족 전체가 국가발전에 열중하고 있었느니 만큼 삼백만 부흥운동은 크게 호응을 보지 못하였었다고 하였다. 사실 이 운동이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대중집회를 한다든지 초교파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려는 강한 도전을 받고 사명감에 충만한 사람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는 한국교회사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2. 2만 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 삼백만 부흥운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사역은 2만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사명이었다. 증경총회장인(12대) 신현기 목사는 말하길 2만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것은 개척자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정신이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실에 신학교를 졸업 한 후 부교역자나, 교회청빙을 기다리기보다는 나아가서 교회를 개척하며, 특히 교회를 개척할 때는 다른사람이 가지 않는 벽고지나 농촌, 어촌, 등으로 가도록 권장하였다. 이어서 말하길 김치선 목사야말로 개척자의 삶은 살아 온 증인이었기에 이와같은 부르짖음이 가능하였다. 대한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당연히 교회개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심지어 학교에 재학중에도 개척교회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였다. (신현기 목사와 대담 2001년 5월 17일) 1950년대에 우리 민족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수난과 궁핍과 처절한 생활고를 해결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다시 번영할 수 있는 비결을 영적 운동에서 찾았다. 김세창 박사는 그의 책 빛을 향하여에서 이 우물파기 운동이 영적으로 전개되어 김치선 목사 생애에 3천여 명의 제자를 내고 목숨까지 바친 마지막 운동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다시 말해서 동네마다 우물을 파는 운동이니 대한민국을 통틀어 2만8천여 동네였다. 마당에 우물을 파고 이 우물로 교회를 세우는 운동이다. 동네마다 우물인 교회가 세워지니 심령이 변화되어 예수 믿고 변화 받아 영생의 자리에 들어가고, 마음이 깨끗해져 부정과 사리사욕이 멀어지고, 예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니 우리 나라는 천국을 이룰 것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는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선진으로서 불쌍한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근원이 될 것이다. 이 때에 “교회 세우러 가자”는 표현 대신 표어로 내세운 것이 바로 “우물 파러 가자!”였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서, 생수를 받아 영적으로 육적으로 축복받는 특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신약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이 우물을 파는 일을 했으니 동네마다 나라마다 지방마다 나아가서 교회를 세우고 천막을 기웠으니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님 축복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창 12:1-3). 김치선 목사는 대한신학교 학우회지인 우물 창간사에서 말하길,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우물을 파는 것이다. 신학도들은 금년으로 우물 하나씩을 팔 결심을 하여 그대로 실현하기를 바란다.”(1955. 12. 13)라고 하면서 교회개척을 강조하였다. 3. 김치선 목사와 박태선 김치선 목사에게도 간과할 수 없는 실수가 있었다. 그것은 박태선과의 관계에서였다. 정성구 박사는 “김치선 박사는 1950년부터 총신교수로 9년간 봉사했다. 그리고 그는 1960년 성경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또 대한신학교 교장으로 평생 일하였다. 한때 박태선 장로와 더불어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것이 그의 생애 가운데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연세대학교 민경배 교수는 김치선 박사와 박태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태선 장로의 철저한 섹트(sect)적 사회 윤리의 감람나무, 곧 한국 ‘예수교 전도관 부흥 협회’는 6.25 사변 후의 교계와 일반 민중 사이에 불길처럼 확대해 갔다. 김치선 목사 창동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은 그는 1955년 3월 하순, 남산 광장에서 김목사와 미국의 스완슨 부흥사를 초빙하여 함께 대대적인 연일 연속의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신구약의 예언된 ‘감람나무’를 차저하면서, 토착적 민간 신앙에서 흔히 쓰는 심정의 광란 상태를 일으키는 술수(박수, 발장단, 몸 흔들기, 고성방가, 통곡기도)를 팔 다리로 삼아 전란 후의 신앙 심리의 행방을 포착, 거기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남산 부흥회에서는 난데없이 썩은 뼈 타는 냄새가 나더니, 그 악취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백합화 향기가 나기 시작하고 이슬비 내리고, 기이한 광채가 그 분위기 속에 자욱했다는 이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며칠 사이에 서울 가두마다, 부흥회 천막의 들보나 밧줄에 신비한 광채가 찬란한 사지 복사판들이 나붙기 시작했다. 병자의 기적적 치료와 성신의 효험있는 임재가 부흥 군상들의 대화 속에서 놀라움으로 전달되어갔다. 이들은 결국 일단의 성도적 공동사회-천년성-를 형성하여, 경기도 소사, 덕소, 그리고 경남의 기장에 신앙촌을 건설하고 자급자족의 종교적 경제 공영사회를 이룩했다.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이하면서 김치선 목사는 남대문교회에 시무하게 되었고, 일본에서부터 알게되었던 박태선 집사는 남대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를 나와서 창동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을 때도 함께 행동을 했다. 박태선은 서울 창동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뭇성도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교회의 모범으로 봉사하던 박태선 집사가 창동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치선 목사는 그가 은혜를 받았다고 교만하여 탈선할까봐 걱정하여 그에게 대한신학교를 다녀서 신학공부를 해야 탈선하지 않는다고 늘 권고했다. 그래서 그는 신학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바쁜 생활에 미루어 오다 결국은 김치선 목사의 우려대로 신학의 바탕이 없이 은혜를 받아서 그만 탈선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박태선 장로가 김치선 목사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목사님! 앞으로 내가 집회하여 얻은 이익은 반드시 대한신학교를 위해 쓰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이 말에 감동받은 김치선 목사는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그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했다. 김치선 목사는 1954년 발행된 복음세계 제3호 “실업청년과 복음운동”이라는 글에서 말하길 박태선씨를 김치선 목사가 추진하고 있는 복음운동의 취지를 잘 알고있는 분으로 소개하면서, 기성교회에 불합당한 행동을 하는 자가 없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인들 가는 것을 막기만 하지 말고 교회의 지도자가 그 집회에 참석해보고 바른 비판을 하여 교인을 선히 인도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다. 1955년 3우러 28일부터 시작된 남산고원(조선 신궁터 광장)에서 열린 집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고,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을 체험한 신자들을 자신의 모든 귀금속과 재산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헌금했다. 집회가 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박태선 장로의 생각은 김치선 목사와는 달랐다. 박태선 장로는 자신의 약속대로 집회의 헌금을 대한신학교를 세우는 데 쓰기보다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도관을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치선 목사는 대한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재정이 필요하였고 이것을 충당하기 위하여 박태선과 모정의 약속을 하고 집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나 박태선이 약속을 이행하지 아니하므로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지도자로서 사람을 잘못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박태선 장로의 탈선은 급기야 한국의 목사님들이라도 자기에 와서 안수 받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성령이 없는 사람이요, 구원받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목사 자격이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기에 이르렀다. 김치선 목사도 자기를 순종하고, 따라야 참 사람이 되고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악령에 속한 사람이니까, 자기에게 와서 회개하고 생수를 마시라고 했다. 이로 인해 김치선 목사는 그와 결별을 하게 된다.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 장로와 함께 집회를 했던 것은 대한신학교를 사랑하고, 육성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동기의 협력이 결국 집회의 성공에 따른 박태선 장로의 탈선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있어 크나큰 오점으로 남고 말았다. 박태선 장로가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교계의 원로였던 권연호, 김치선 목사 같은 이들과 윤치영씨 등 정계 요인의 후원이 컸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다른 김치선 목사의 실수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산군이 남한을 침략함으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공산군이 삼일만에 서울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이소식을 듣고 교회를 떠나 삼각산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남대문교회에서는 김치선 목사가 삼각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대표로 한상기 장로가 삼각산에 갔다. 배명준 목사가 남대문교회의 부목사로 시무하였는데 그는 숨지 않고 서울에 있었다. 한상기 장로는 김치선 목사를 설득하여 교회로 내려 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한상기 장로는 김치선 목사에 의하여 거절당하고 삼각산을 내려갔다. 그후 삼각산에서 내려온 김치선 목사는 삼개월동안 지하에 숨어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옥오열 선교사의 도움으로 한경직 목사 가족과 김치선 목사 가족, 그리고 총회장 권연호 목사 가족이 피난을 가게 되엇다. 박용규는 지적하기를 ‘6.25동란이 일어났을 때, 교인들보다 먼저 피난을 갔던 것이다. 그러나 교육목사로 있던 배명준 목사는 교인을 다 피난 보내고 그 후에 떠난 고로 6.25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된 후 남대문교회에 담임목사로 계속 시무하게 되었으나, 김박사는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김박사는 학자이지 목회자는 아니였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상황이 김치선 목사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를 지켜야하는 목사의 사명과 어려운 상황를 피해 피난을 가야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김치선 목사는 후자를 택함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끝난 후 동사목사이었던 배명준 목사에게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인계하고 자신은 창동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상의 사건들이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를 시무하면서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삼백만 부흥운동’과 ‘이만 팔천동네에 우물을 파라’고 하는 운동은 1940년대 후반의 한국교회상황이 복음을 증거해야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김치선 목사의 중대한 업적으로 평가 할 수 있지만, 이 운동들을 조직하고 진행하는 행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열약한면을 보여주어 나아가자는 구호는 외쳤지만 한국교회를 움직일 만한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더욱이 박태선과의 관계에 있어서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을 바로 알지 못함으로 한국교계에 엄청남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치선 목사는 그 누구보다도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였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했으며, 개척정신을 부르짖었다. 김치선이 한국과 일본에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지만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어서 한국교회에 대형교회로 자리잡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에 지금까지도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 2 절 일본선교 : 선교사로서 김치선 카나다 장로교회 소속인 영재영 선교사가 일본으로 파송 받게 되었을 때 김치선은 영재영 선교사와 함께 가서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일본에서 신학교육을 마쳤고 일본에 대한 체험에 있었으며, 당시 일본 안에 있었던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안양대학교 신학부 약사를 저술한 최정인 목사는 김치선 목사에 대하여 말하길 김치선은 1930년 2월 23일에 일본 신호중앙신학교를 졸업했다. 김치선의 나이 31세였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위한 순회목사로 취임하였다. 그의 사역지는 쓰시마, 큐슈우, 훗가이도, 아모리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일본 관서지방의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동경 잇지신학교에서 강의도 하셨다. 김치선 목사는 영재영 선교사의 후원으로 동경 YMCA 대강당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특히 김치선 목사는 1939년부터 1944년 까지 재일교포를 위하여 니시노마아교회, 혼요고교회, 아까시교회, 대판 동부이 와까야마교회, 모리베교회, 메구로교회, 이께부르교회등을 개척하였다.(2000년 10월 20일 최정인 목사와 대담) 또한 신호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였고, 동경신숙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 대단한 부흥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경신숙중앙교회에 가면 조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요일이 되면 믿지 않는 유학생들도 자기 친지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교회로 나왔다. 그래서 늦게 가면 교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 그 교회의 제직이나 성가대원들은 후일에 한국을 위해 공헌한 유명한 분들이다. 또 일반 교인들도 후일에 귀국하여 국회의원, 공직자,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교육가, 사업가, 과학자, 유명한 목사들로 활약하게 되었다. 일제시대부터 유명했던 음악가 고 이인범선생은 성가대를 지휘하였고, 와싱턴 D.C.에서 ‘한국의 소리’에서 일하시다가 작고하신 고 황제경 목사는 성가대원의 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의 조선인의 유학은 일본이었다. 그러므로 김치선 목사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어서 동경안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도자의 위치가 상승함에 따라 모든 행동에 세심한 주의가 요구되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일본이 한국교회에 대하여 강압정책을 펴고있었고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예배전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목회자에게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런데 1940년 김치선 목사는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중직가운데 한사람이 김치선 목사가 한국어로 설교했다고 경찰에 신고하였기 때문이었다. 김치선 목사에게는 약 일년간의 감옥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김치선이 수감생활을 하게 됨으로 인하여 본인뿐 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김치선 자신의 사명을 더욱더 확고히 했으며,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고 있지만 이 일이 오히려 김치선 목사 민족의식을 새롭게 고취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김치선 목사는 과거의 자신의 화려한 생활을 잊어버리고 주어진 현실에 충실함으로 오히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고, 또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잘 진행디면 현실에 따라 안주하기 쉽고, 반면에 조그만 어려움이 닥쳐 올 때에 실망하고 낙심하며 또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쉬운데, 김치선 목사는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절대 미워하지 않았고,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향하여 불평하지도 않은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절제함으로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 전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 교포를 상대로 한 전도 및 선교활동을 의미한다. 1911년 도쿄에 있던 감리교 출신 유학생들이 따라 감리교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같은 지역에 장로교, 감리교가 따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일본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라 하여 일본에서만큼은 초교파적 연합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또한 장로교측으로서는 중국 산동지방에 현지인을 위한 선교를 계획하고 있어 일본 선교까지 단독으로 추진하기엔 벅찬 감도 있었다. 그 결과 장로교 독노회와 미감리회, 남감리회가 동의하고 재한 복음주의선교부 연합공의회에서 실무를 담당하기로 했다. 교회명칭은 ‘재일본동경조선 예수교연합교회’로 하였으며 교역자는 장로교, 감리교에서 2-3년 교대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장로교에서 주공삼 목사가 연합교회 초대목사로 파송되었고 1-3년 주기로 장로교, 감리교에서 교대로 파송했는데 김치선 목사는 1935년부터 1944년까지 목회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 교단 소속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치선 목사의 열정을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를 이끌고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한다. 그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면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뜨거운 가슴의 열기만이 보이지 않는 신앙 세계를 이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의 아성을 쌓아 놓고 자기 위주로 교단을 이끌어 가기도 하고 목회를 하기도 한다. 때문에 오늘 한국의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의 전체 공동체보다 개교회주의로 흘러가 그곳에서 안주하려고만 한다. 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김치선 목사는 어느 곳에 가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여러번 사역지를 옮겼지만, 심지어 감옥에 들어가는 어려운 상황을 만났지만 굴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사명인 영혼구원을 위하여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였음을 볼 수 있다. 김치선 목사야 말고 대신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 있기 전에 최초의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달. 김동화는 말하길 ‘구슈와 시모노세기에서 북쪽 훗가이도까지, 조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복음 전했다. 가는 곳마다 믿는 자가 생기고 그 곳에 교회를 세웠다. 처음에는 가정집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그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날마다 믿는 자가 더해 갔다.’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김치선 박사의 남대문교회에서의 목회활동을 통하여 열정적인 목회자의 모습을 보았고, 일본에서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헌신적인 선교사로서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후대에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겸손한 자세로 대하면서도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는 추호도 양보가 없었던 그 확고부동한 신념과 강인한 성품은 한국교계를 대표하는 목회자중의 한사람으로, 또한 선교사중의 한사람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오피니언
    2021-03-20
  • 총회의 카페가 오픈을 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코로나로 멈춰버린 일상으로 고통받는 동역자를 볼 때 아픈 가슴이 저며 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승리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반드시 회복되고 우뚝 서리라 믿습니다. 그간 교단의 통합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안타까운 심정으로 머뭇거리던 마음을 비우고 교단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 후배님들의 고견을 경청하고 미래를 책임지고 이끌 수 있는 교단으로 세워갈 것입니다. 연말에 상임부서와 노회장님과 총회 임원과의 상견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깊어가는 코로나로 보류하고 있습니다. 신년에는 총회 상임 부서장님들과 우리 총회의 기둥인 노회의 임원 목사님과 총회 임원이 함께 신년을 하례하는 행사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어 실행위원회를 통해 우리 총회의 나갈 길을 열어가려고 합니다. 신학이 없으면 교단은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총회는 호서대학과 인준을 준비를 마치고 대학원 커리쿨럼을 우리 총회에서 위임하여 교육을 통해 후배를 양성할 수 있도록 위임받았습니다. 그 외 다른 대학과의 MOU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우리 총회는 우리 신학으로 후배를 양성하는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4-5년 후에는 알차고 멋지게 다져져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대단한 총회가 될 것입니다. 총회도 슬림한 총회로 모든 권한을 노회에 위임할 것입니다. 상임위 및 부서장과 총회 임원은 카페에 공지하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이 만나고 싶었습니다. 총회의 카페가 오픈을 했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가입하셔서 함께 소통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대신총회] http://naver.me/GfZhCoAn 추후에는 카페에서 소통하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다시 복음 앞으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목양 이루세요. 기도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20년 12월 19일 총회장 강대석 목사 드림.
    • 오피니언
    • 목회서신
    2021-03-20
  • 성지순례의 참 의미
    한국교회의 대표적 성지 중 하나인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에는 해마다 50만 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오간다. 전주교구 치명자산, 수원교구 미리내성지, 원주교구 배론성지 등에도 한 해 수십만 명의 순례 발걸음이 이어진다. 특히 9월 순교자 성월이면 각 성지들은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순례객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하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성지가 순교성지인 덕분이다.성지순례.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신심행위의 하나로 꼽힌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이끈 대표적 신심행위라는 수식어도 늘 붙어 다닌다.하지만 한국교회 성지순례 실태를 되짚어보면 쇄신, 보완해야할 과제들이 산재해 있다. 국내 순교성지를 순례하는 여정은 한국교회 고유의 순교영성을 매개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연례행사처럼 이어지는 ‘성지관광’식의 순례를 비롯해 무엇보다 한국교회 고유의 순교영성을 체득하는 노력도 부족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모든 종교인들은 ‘순례’라는 이름으로 성스러운 종교여행을 한다. 순례는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는 본질적인 현상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지순례는 단순히 진리를 추구하고, 정신적 풍요를 체험하고자 나서는 여정이 아니다.성지순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깊은 신앙의 표현이다. 이러한 참뜻을 올바로 알고 실천할 때, 한국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이상적인 영성인 순교영성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성지순례의 기원지구촌 곳곳에서 성지순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성지순례’라는 표현으로 시작됐는지 그 기원이 뚜렷하게 증명되진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유다교인들이 해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 수확한 곡식을 바치던 행위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진다.신약 시대에 들어서서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진 로마 순례가 보편화됐다. 또 8세기 즈음에는 성지순례가 신자들의 의무로 인식될 만큼 관습화돼 순례단이 조직되기도 했다.성서학자들은 교회 안에서 순례는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닐 뿐 아니라, 동시에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영감을 받아 진행된 것이 많다고 설명한다. 또한 성지순례는 가톨릭신자들의 신앙생활의 쇄신과 내적 변화를 제공하는 기회로써 꾸준히 발전돼 왔다.■ 왜 순례를 하는가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자체가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여정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느님과 상의하기 위해, 축복받기 위해 순례를 이어갔다. 신약에 들어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들에 동참하기 위해 그 사건들이 일어났던 근원적인 장소들을 찾아가고자 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로는 속죄 차원에서 진행하는 순례가 일종의 신심 형태로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아울러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회개의 행위, 성인에 대한 존경, 영적 은총을 받기 위한 실천 방법 등으로 성지순례의 폭을 넓혀왔다. 이러한 순례 역사는 그리스도교 영성 발전에도 풍요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왔다.특히 그리스도교의 경우 전통적으로 순례는 ‘회심의 여정’이라고 강조한다. 대부분의 순례는 깊은 영적 변화를 갈망하면서 자신의 내적 불완전함을 돌아보고,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포함내역 *왕복항공권/유류할증료*전일정 숙박비/차량비*여행지입장료/인천공항세/현지공항세*1억원 여행자보험*관광진흥개발기금(10,000원)/전쟁 보험료 불포함내역 1 인당 전 일정 70 USD의 가이드/기사 경비를 현지에서 지불해야 합니다.※ 15명 미만시 20~30달러의 추가 가이드/기사 경비 발생합니다.*개인적인 음료비용*호텔 객실 TIP 및 포터 이용시 포터비용*객실 TIP : 1$ 10~12장 준비하시면 편리합니다.☞ 환전안내 : 요르단 / 이스라엘 USD 달러 통용 됩니다. 매너팁은 소비자의 자율적 선택으로 지불여부에 따른 불이익은 없습니다. 상품소개 ☞ 2,000년 전 예수님이 계셨던 그 곳. 역사와 종교가 살아 숨쉬는【이스라엘】◈ 신비로운 바다 사해에서 부영 체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신 갈릴리 순례- 가버나움, 베드로 수위권교회, 오병이어기적교회, 팔복교회◈ 예수님이 첫번째로 기적을 베푸신 가나와 나사렛 순례- 가나 혼인잔치 기념교회, 마리아 수태고지 기념교회◈ 기독교 최고의 성지 예루살렘 순례- 감람산과 감람산 주변의 기념교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신 십자가의 길과 골고다 언덕, 예수님 무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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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0
  • 목회자 건강상식과 의료선교
    목회자 건강상식과 의료선교 최초의 목회자 건강 보고서 저자 서광수 출판 쿰란출판사 페이지수 404 사이즈 152*223mm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질병이 걸렸을 때 대부분 기도하고 믿음으로 고치려고 하고 병원을 다니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비쳐지는 선입견 때문에 공개적으로 치료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목회자들은 병원을 찾는 것을 더더욱 꺼려 왔다. 이 책은 그동안 선교회를 통해서 수없이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치료해 오면서 의학적인 기본 상식만 알아도 예방할 수 있었던 질병들에 대한 정보와 관리치료 방법, 건강 상식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스스로 건강을 체크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다.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병원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건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목차 추천사_ 아름다운 교회 김의철 목사 산성교회 이천수 목사 책을 내면서 A. 가정의학, 내과적 상식 B. 노화 방지 클리닉 C. 정형외과적 상식 D. 목회자의 건강 관리 부록 1. 의료 선교와 병원 전도 2. 예수님 보혈의 의학적인 고찰
    • 오피니언
    • 건강상식
    2021-03-20
  • [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1)
    서 언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의 원조가 되신 분이다. 그분의 역사를 탐구하고 되새겨 보는 일은 앞으로 대신의 역사를 가름하는 중대한 지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는 시공간의 사건에 기반을 두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주권적 해석이 적용될 때 올바른 역사관을 소유하게 되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재산이 된다. 일방적 자기주장을 단편적으로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교회가 걸어온 역사에는 교리적 배경이 시대적으로 나열되어 왔다. 그것이 교회사적 신학이다. 교회사를 뒤돌아보면 역사의 아이러니(Irony)가 지속되어 온 것처럼 느껴진다. 대신의 역사를 되새겨 볼 때 교회사의 한 단편이 나타난 것처럼 느껴진다. 교단의 역사는 교회사적 신학에 기초한 교리교육이라는 반석 위에 정치적 제도를 튼튼하게 세워갈 때 지속적으로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게 된다. 그것이 교회사가 증명한 역사였다. 대신교단이 그 교리교육에 기초하여 교단을 형성해 왔는가? 김치선 박사의 노고를 뒤돌아보고, 당시의 역사를 가감 없이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대신의 역사를 정립하는 작업이 절대 필요한 시점이다. 절대 단편적으로 그분의 애국운동과 그분의 보수적 신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신구약의 교회사적 기준을 통해 당시의 역사를 해석하고 미래 지향적인 신학적 그리고 정치적 역사관을 형성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1. 김치선 박사의 생애 김치선 박사는 1899년 8월 10일 김영준씨와 최현숙 여사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그를 가르쳐 준 김응보 선생이 영수로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선생으로부터 전도를 받았고 또한 같은 서당에 다니던 영특한 이홍순이라는 여자 학생 역시 전도를 받고 함께 성경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치선 학생은 후에 이홍순 학생과 결혼하게 되었다. 김치선의 부친 김영준씨는 어업을 경영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나 그 가족에 고난의 회오리가 닥친 것은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되고 부터였다. 40여척의 배와 함께 배에 탄 어부들은 폭풍으로 말미암아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치선의 할아버지는 생명을 잃은 가족들에게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김치선의 가족들을 오막살이 집에 남겨놓고, 영흥으로 돈벌이를 위해 떠났다. 그러나 그는 3년 후 극심한 고생으로 세상을 떠나고 치선의 아버지 영준씨는 1916년 온 가족과 함께 함경도 장진의 화전민으로 들어가 산지를 일구며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함흥에 카나다장로교 선교사 영재영(L. L. Young) 목사가 화전민들이 살고 있는 서호리에 복음을 전하려 왔다. 영재영 선교사는 영특한 소년 김치선을 보고 자신이 데리고 가서 키우겠다고 말했다.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치선을 데리고 와서 가정의 일을 시키며 학교를 다니게 했다. 당시 카나다 선교사들은 다수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기반을 둔 독일의 문서설을 지지하는 신학을 함경도에 거점을 두고 전파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어 김치선에게 전파된 복음은 보수주의 신학에 기반을 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정통주의 신학이었다. 그것은 김치선을 미국에서 보수주의 신학을 공부하도록 주선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영 선교사는 후에 김치선에게 공부할 신학교를 추천할 때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추천해 준 것을 보면 그의 신학적 입장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치선은 1933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치선 박사가 영생중학교를 다닐 때, 지금의 학제로 고등학교 3학년 나이에, 1919년 3.1 운동일 일어났다. 그도 그 운동에 가담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당했다. 그리고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했다. 아마 김치선 박사의 강한 민족주의 애국운동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생을 12시 고동소리와 함께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수시로 눈물을 흘린 삶은 민족과 국가를 위한 그의 심정이 어떠했느냐를 대변해 주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목회할 때 내선일체에 맞도록 한국말로 설교하지 말고 일본어로 설교해야 한다는 정책에 반항했다는 죄목으로 1940년 왜인들의 경찰에 체포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가끔 김치선 박사의 설교 녹음을 듣게 될 때 긴장되는 것은 그분의 한국민족을 향한 애절한 외침과 눈물이 언제 터져 나오느냐? 이었다. 그 같은 느낌이 들자마자 목소리가 높아지며 눈물로 호소하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설교가 시작되고 약 5분이 지나면 목이메인 외침이 시작되었다. 왜인들에게 당한 한국 민족의 한이 깃들어 있었던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아마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고 제자들에게 호소하면서 국민의 11조 300 만 성도를 달라고 기도한 신념이 여기서부터 나온 것이다. 복음화 운동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분이 순교자 손양원 목사와 절친하게 지냈던 일도 미루어 보면 민족 사상이 깊이 깃들어 있었던 연고로 생각되어 진다. 손양원 목사와 300만 전도운동을 함께 한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비화를 언급할 것이 있다. 김치선 박사는 손양원 목사를 모시고 남대문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총살한 안00이라는 살인자를 아들로 삼아 부흥회에 데리고 오셨다. 남대문 교회 앞에 세계의 성자 손양원 목사 라는 포스터를 크게 써서 매달았다. 그때 손양원 목사는 그 포스터를 떼지 않으면 부흥회를 인도할 수 없다고 우겼다. 하는 수 없이 그 포스터를 걷어내고 부흥회를 열게 되었다. 지금도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인 여수 애양원에 가면 손양원 목사와 김치선 박사 두 분이 다정하게 앉아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김치선 박사가 한국에서 활동한 거점은 남대문 교회와 대한신학교이다. 당시 남대문 교회는 교통이 원활한 서울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갈라지기 전에 전국에서 영락교회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선생이 자주 출석하기도 했다. 1948년 8월에 야간에 공부하는 대한신학교를 남대문 교회에 창설하였다. 초대 원장에 윤필성 목사가 취임하였고 뒤이어 1년 후에 김치선 박사가 취임하였다. 북에서 남으로 넘어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신학교였다. 이 학교가 대신교단을 설립하는 모체가 된 것이다. 교단은 신학과 정치적 일치를 통해 형성된다. 그 신학을 형성하는 모체가 신학교이다. 신학교의 노선은 교단의 신학을 결정하는 뿌리이다. 구미의 역사가 그랬다. 신학교의 자유주의화는 교단의 멸망을 촉진하는 원인이다. 교회의 문제는 신학교의 문제로 연결된다. 신학교의 문제는 이사진과 교수들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사진과 교수들이 돈과 자신의 영예만을 위해 정치를 일삼을 때 신학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럴 때 학생들은 성경에 기초한 신학을 배울 수 없다. 후에 그들이 남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정치에 매진하게 된다. 6.25 전쟁이 휴전됨에 따라 서울에 평화가 깃들고 대한신학교를 다시 개강하게 되자 학생들이 날로 늘어가게 되었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다시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신학교 7회와 8회에 학생 수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때 졸업한 학생들이 졸업 후 교계의 각계각층에서 많은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1954년 김치선 박사는 기도에 열중하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도원 자리를 찾아 나섰다. 지금의 서울대 자리에 벧엘 기도원을 세웠다. 당시 많은 대한신학교 학생들이 시간이 나는 대로 관악산 벧엘 기도원을 찾아가 기도에 몰두한 적이 수없이 많았다. 더불어 김치선 박사에게 닥친 환란은 겹치고 또 겹친 사건들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대한신학교 건물과 한양교회(창동교회를 개명)의 화재로 전소된 사건,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양회에 가서 7명이나 익사한 사건, 그리고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법적 다툼 등이었다. 6.25 남침으로 인하여 피난 중에 남대문 교회는 다른 목사가 와서 목회하게 되자 김치선 박사는 한양교회를 새로 설립하고 남산 2,500평의 땅위에 세워진 일제 때의 신사(神社) 건물을 매입하여 교회와 학교로 사용하던 중 1956년 어느 날 새벽에 신학교와 한양교회가 전소된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김치선 박사는 충격을 받아 병중에 눕게 되었다. 남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건물은 전소되고 땅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폐허된 땅에 임시로 대형 콘세트를 세워 신학교와 교회를 함께 사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속적으로 일어난 마찰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부가 대한신학교와 한양교회가 사용하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한 결과 벌어진 소송과 더불어 정부의 시책이 발표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신학교는 하나의 교단을 배경으로 하여 운영하라는” 것이었다. 대한신학교는 1952년 4년제 각종 대학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교단과 관계를 가져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대한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의 야간 신학교로 운영을 해 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단독 교단을 만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김치선 박사는 당시 근본주의의 선두주자였던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의 총재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와 연관을 맺고 1960년 성경장로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1966년 김치선 박사는 암스텔담에서 열린 ICCC 국제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다. 그것이 국제대회에서의 마지막 강단이었다. 잠시 미국에 들러 필라델피아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쉬고 귀국하려던 참이었다. 거기서 갑자기 쓰러져 전신을 쓰지 못한다는 통보가 한국으로 날아들었다. 언어도 쉽게 구사할 수 없었고 대소변도 자유롭지 못했다. 머리에 혹이 생겨 미국에서 8시간이란 긴 수술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날로 쇠약해져 갔다.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최순직 목사를 귀국하도록 하여 신학교를 돕게 하였다. 최목사는 어느 정도 학교의 급한 일을 수습한 후에 다시 학업을 마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급하게 25세의 젊은 나이로 김치선 박사의 외아들 김세창 박사가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김치선 박사는 1967년 12월 21일 이사 최용찬 장로와 김세창 교장을 불러 마지막 회의를 주관했다. 1968년 2월 24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김치선 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쉼을 누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 오피니언
    • 특별기획
    2021-03-19
  • [총회장 목회서신] “기도를 선포합니다”
    2021년 신축년에는 COVID19가 소멸되고 여러분의 삶터에 평온한 일상의 삶이 회복되기를 기원합니다. 우한에서 시작된 COVID19라는 역사적인 재난으로 인해 삶과 사회의 모든 것이 멈춰 엉망이 되고 우리 한국교회는 교회활동이 중단되어 신앙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사회로부터 신뢰 상실과 교세 감소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특히 우리 교단은 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한 어려움을 견디며 왔습니다. 이제 우리 교단은 이 위기를 넘어서 회복과 부흥을 향해 매진할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교단의 동역자 목사님과 온 성도는 회복을 위해 한마음으로 달려갑시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합시다. 반드시 하나님은 회복과 부흥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대신 교단을 세우신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정오에 모든 일정을 미루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만 팔천 동리에 우물을 파 민족 복음화에 대한 열정과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고, 복음으로 세워 영적 부흥을 이루는 일들을 이제는 우리가 이어가야 합니다. 본 교단은 ”주여! 우리를 회복시켜 주옵소서!“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이 기도를 선포합니다. 총회 산하 모든 노회와 교회는 매일 정오 시간에 모든 일손을 놓고 5분간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제목 코로나19의 소멸과 예배와 사역회복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총회 및 노회와 교회의 역할 감당을 위해 감사드립니다. 2021. 1. 25 총회장 강대석 목사
    • 오피니언
    2021-03-16
  • [칼럼] 성경적 효와 기독교신앙
    ◈ 성경적 근거 : 신·구약 성경의 효 성경의 십계명 중 5계명에는 기독교 윤리의 규범에서 첫째로 효를 두고 있는데 성경의 효 개념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고 실현되지 않아 경시되었다. 따라서 성경적인 효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 구약 성경의 효 : 십계명과 성경적 효 (1) 성경적 효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실현하려면 먼저 인간 삶의 역사성과 삶이 이루어지는 구체적 생활 현장에서의 인간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십계명(十誡命) 특히 제5(부모공경)계명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성경적 효의 정체성을 알아보려면 먼저 하나님이 역사 속에 현현(顯現)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와 오경에서의 십계명의 형성 배경과 내용을 파악함이 중요하다. ① 하나님의 도덕법으로서 십계명 하나님의 법은 곧 하나님 자신의 계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체로 자신의 법을 통해서 창조물을 통치하신다. 따라서 법은 하늘과 땅에서 그분의 바람을 수행하는 것이다. 법은 인간 존재의 전 영역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연법칙들은 육체의 삶을 주관하며, 사회적 법규들은 사회를 주관하고, 영적인 법칙들을 영적인 영역을 주관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문제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효는 단순한 윤리적 차원의 행동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하여 직접 명하신 준엄한 하나님의 절대명령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효에 관한 의지를 가장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십계명에는 어떤 이유나 전제가 없이 다만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하라’, ‘하지 말라’는 준엄한 명령만 있을 뿐이다. 십계명에 나타난 제 오계명의 명령은 인간의 사고와 판단에 구애됨이 없이 인간이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절대 명령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②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권위를 보여주신다. 그러기에 자녀들은 부모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며, 또한 하 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죄악임을 깨닫게 하신다. 자녀는 부모에 의하여 그 육체가 조성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신(神)만이 가질 수 있는, 이른바 자녀들의 생명의 원천이라는 지위를 주시므로 부모에게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신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생명의 공급자가 부모가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귀한 생명을 부모를 통하여 주신다. 여기에서 성경이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무한한 생명의 가치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창1:26,27). 생명은 신비스럽고 성스러운 것으로서 창조주로부터 우리에게 맡겨진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지극히 존귀히 여기고 사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이 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를 공경해야 마땅한 것이다. 부모의 질서를 어기는 사람,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봉양하지 않는 사람, 부모를 경멸하고 반역하여 부모의 권위를 침범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이다. 이는 자녀가 공경해야 하는 부모의 가치는 다만 하나님의 의도와 정하심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도 역 시 인간이기에 부모라고 해서 완전할 수는 없지만,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순종과 공경을 요구할 권리가 여기에 있으며, 부모가 자녀에게 순종과 공경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기도 하다. ③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삼상7:14, 대상17:13, 시68:5, 시89:26, 사63:16, 렘3:4,19, 말2:10 등),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칭하는 데는 첫째,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에서 하나님을 인류의 첫 번째 조상으로 소개한 것처럼(눅3:3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조성하신 분이시라는 것과(사43:1, 사44:2,24), 둘째, 육신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는 분이시며, 셋째,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공경을 받는 것이 마땅하듯,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당연히 경배 받아야 하실 분이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Rev. 한요한 D.Min. E –mail : hany77777@hanmail.net Cell phone : (010-9079-0049) - 국제신학대학교 졸업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신학대학원) M.Div졸업 - 개혁신학연구원 목회학석사(M.Div)졸업 - 미국, 쉐퍼드대학교 신학대학 목회학박사(D.Min)졸업 - 미국, 코헨대학신학박사, 객원교수 - 21세기 지구촌복음화 부흥협의회 총재 - 교회본질 회복운동본부 총재 - 부패방지 국민운동본부 연합회장 - 원주충만교회 담임목사 - 저서 : 기독교 효 신앙 교육 - 칼럼 : 기독교신문 외 다수 고정칼럼 연재 - 강연 : 국내외 1,000회 이상
    • 오피니언
    2021-03-15
  • 코로나 시대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앞으로 코로나19와 같은 일들이 계속하여 이어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집회와 예배의 자유조차도 제한을 받고 있으나 할 말을 잃고 있는 현실이다. 공익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이런 일이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종교자유를 제한하는 강제적인 압박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일 예배 금지령을 내리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믿어 왔다. 그런 일을 불가능한 것이며 굴복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바벨론 포로 시절에 하루에 3번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흠잡을 것이 없었던 다니엘은 감시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당시의 종교법에 의하여 사자굴에 던진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바르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교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벌써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게 되었다. 예배도 비대면 예배가 일상화 될 것이다. 교회 사역도 소그룹이나 심방사역의 필요도 약화 될 것이다. 교단 회의도 화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홀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때에 하나님을 대면하는 깊은 영성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SNS를 통하여 매일 묵상함 말씀을 나누고 공유하는 것에 익숙할 것이다. 영상에 자주 등장하는 특정 교회나 목회자의 선호도가 더 강해질 것이고 개 교회 목회자를 통하여 신앙생활의 영향력도 약화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설교자들의 고민이고 과제이다. 비대면으로 제자훈련, 전도 훈련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매체들도 등장할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로 교육하고 양육하는 길을 지금부터 교회와 교단이 준비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선교지가 부각되고 있다. 그것은 이웃이다. 종교개혁이 인쇄기의 발명을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 출간하여 대중에게 보급하는 일에 활용함으로 개혁의 동력을 얻었듯이 이 시대의 새로운 복음 전파를 위한 정책을 세워야 한다. 또한 어려운 지역교회에 대한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 시대적 필요를 채워주는 프로그램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하고 경제적인 도움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코로나19 이후의 교회는 이전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위기는 기회이다. 더 나은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자.
    • 오피니언
    • 사설
    2021-03-14
  • [창간 축사] 박근상 목사 "기독연합신보가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통합과 분열, 퇴행과 전진을 거듭하는 소용돌이속에서 산고를 겪었습니다. 김치선목사님의 개척정신과 민족복화의 정신을 이어가는 새로운 교단지가 뜨거운 함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기독연합신보는 대신 교단의 지나온 역사를 담을 것이며 또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 교단지가 될 것입니다. 정규적으로 총회장의 목회서신을 지면 1면에 올려서 교단의 현주소와 비전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정론지로서 바른 신학, 바른 신앙, 바른 목회의 자표를 정해주는 길을 열겠습니다. 목회자들에게는 성경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문을 활짝 열겠습니다. 더 멀리 더 넓게 더 높이 목회의 길을 열수 있도록 안내하는 지혜의 창고가 될 것입니다. 목회 현장의 영성과 땀 냄새가 배인 소식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 선교현장의 소식도 전할 것이며 해외 선교사들의 사역소식을 발굴하여 함께 기도하며 동역하는 장을 만들겠습니다. 이단을 바로 분별하고 바른 신앙의 기준을 세우는 기독교 변증에 대한 글도 올릴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뼈대를 세우는 특집을 만들어 제공하겠습니다. 우리 교단은 중부권 최고의 기독교 사학인 호서대학교와 인준 관계가 되었으므로 학교 소식과 특히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이 학사 일정과 소식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교단의 모체인 안양대학교의 소식도 빼놓지 않을 것입니다. 두 대학 교수들의 수준 높은 글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코너도 마련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글쓰기를 도울 수 있는 자료들도 올리겠습니다. 목회자와 평신도 가운데 문학적인 재능을 가진 분들의 작품도 발굴하고 공모하여 소개하는 일도 할 것입니다. 또한 성경묵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깊이 글을 올리겠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의 은혜로운 설교를 소개하여 은혜를 공유하는 것도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행사를 알리는 난을 만들고 광고를 원하시면 제작하여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독연합신보는 일차로 교단과 교계소식을 전달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바른 정론을 통하여 지혜를 더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메시지를 전하려면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더 가까이 하게 하는 신문, 세상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힘을 보태겠습니다. 지면 신문 뿐 아니라 모바일을 통하여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신문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는 교단의 70년 역사를 오롯이 담고 미래의 역사가 기록할 것이라는 떨리는 감격으로 신문을 엽니다. 기독연합신문보의 정신이 교단과 한국교회의 정신이 되도록 함께 신문을 만들겠습니다. 함께 만들어 갑시다.
    • 오피니언
    2021-03-14
  • [창간 축시] 유병기 목사 "당신은 왜! 이제 시작했어요?"
    당신은 왜! 이제 시작했어요? 마음 문 열고 당신 기다린 지 오래거늘 왜! 이제 시작했어요? 긴 세월 세상풍파에 검게 탄 마음 되어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고 살아왔소! 긴 세월 풍파 못 이겨 몸은 구부러지고 몸의 생수는 말라갖지만 이제 시작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을 만나는 날이면 검게 탄 찌꺼기 하나하나 없어지겠지 당신의 진실이 거짓의 찌꺼기 버리고 내 마음 깨끗해지겠지 왜! 이제 시작했어요? 하지만, 뛰는 가슴 여전하니 이제 시작일 뿐 당신이 꽃다울 때 시작했다면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제 시작했어요? 하지만, 지금부터 행복 시작입니다.(이제 시작한 창간에 즈음하여 연하 유병기) <유병기 목사>  서울신학교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Fuller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박사)  시인  아시아 복음 선교회 이사장  행복나눔 지역경제활성화 협동조합 이사장  평서노회 노회장  행복나눔교회 담임목사
    • 오피니언
    2021-03-14
  • 지금 그대로 행복 하라 1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 순간도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국회의원? 회의장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행복한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를 리는 없으니까? 대통령?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대통령은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장면은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도 모든 순간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세상의 꼭대기에 오른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참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는 언제나 행복이 가득할까? 많은 사람들이 소박한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기 위해 평범한 삶을 조명하고 일상 속의 행복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상 속에 행복이 있고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일상 속에는 슬픔과 불행도 함께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한 순간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항상 행복한 사람이란 없다. 어떠한 위치에 있든 사람은 행복과 불행 사이를 왕래하는 존재이다. 행복했다가 슬퍼지고 슬프다가 행복해진다. 사람은 왜 이렇게 행복과 불행 사이를 방황하는 것일까? 외적인 조건은 변한 것이 없는데 왜 어느 날은 행복하고 어떤 날은 불행 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와 상황을 거부할 때는 불행하게 된다. 행복은 사람이 처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그 위치를 즐겁게 생각하지 못하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전직 대통령 중에“대통령 못 해먹겠다!”라고 말한 분이 있다. 그 분의 일상은 언론에 보도되는 것만으로도 대통령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괴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만큼 성공한 후에도 슬프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사람은 어떤 자리에 오를지라도 자신의 위치를 즐기지 못하면 불행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위치, 신분과 역할을 최대한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을 찾아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10년만 젊으면 더 바랄 게 없겠어!>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가끔씩 듣는 말이다. 사람들은 젊을 때가 좋았다고 한다. “내가 몇 년 만 젊었어도!” 하며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한다. 이런 사람들이 10년 젊어진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10년이 아니라 20년이 젊어진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나이든 사람은 불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늙은 사람은 불행한가?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행복에 대한 개념은 차이가 없다. 젊어서 행복한 것도 늙어서 불행 한 것도 아니다. 젊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젊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늙어서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국한 된 특권이 아니다. 삶의 모든 시기에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다. 다만 자신의 현재를 인생의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즉 행복은 가치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50대 끝을 삶을 살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젊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침착해진 지금이 좋고, 철없을 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인생에 대한 깨우침, 청년 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세상을 보는 시각, 사람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생각을 여유 만만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금이 나는 정말 좋다. 그런 이유로 나는 철없고 소심 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싫다. 도리어 지금 이 상태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지금의 내가 너무 마음에 들고 나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행복 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최고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다. 오늘의 내 모습이 가장 멋진 모습이다. 지나간 날의 추억에 빠지지 말라. 그러면 오늘이 불행하게 된다. 오늘을 버리고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미래에 매달리지도 말라.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내일도 불행할 확률이 높다. 행복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다. 오늘이 행복이다. 지금 나의 모습 이대로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모습이다. <글/김홍식> -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외 14권 출판. - 부부행복학교 대표. www.booboohappy.co.kr. - 시온LED 대표. http://m.onejin.kr. -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 오피니언
    • 목회칼럼
    2021-03-11
  • [총회장 목회서신] 교단명칭을 대신호서로
    총회장 목회서신 6 할렐루야! 우리 주님의 은혜과 평강이 한국교회와 교단을 위해 헌신을 다하셨던 원로목사님들과 애쓰시는 노회장님과 상임부서장님, 총회임원과 교단의 회원 목사님들 한 분, 한 분 위에 넘치게 부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코로나가 여전히 위협적이고 힘들게 합니다. 더 힘내시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큰 은혜로 회복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몇 가지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2월 27일 11시에 본 교단과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과 인준을 맺었습니다. 신학이 없으면 교단은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총회는 호서대학과 인준을 마치고 대학원 커리쿨럼중 교단사, 헌법, 정치, 신조 등을 우리 총회에서 위임하여 교육을 통해 후배를 양성할 수 있도록 위임받았습니다. 그 외 다른 대학과의 MOU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우리 총회는 우리 신학으로 후배를 양성하는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4-5년 후에는 알차고 멋지게 다져져서 대한민국에 교단을 이끄는 대단한 총회가 될 것입니다. 총회 실행위원회를 마치고 준비된 교회규칙과 헌법이 탈고를 했습니다. 2005년에 개정된 후 십여년 만입니다. 수고하신 법규위원장닙과 위원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단명칭을 대신호서로 정했습니다. 호서대학과 인준을 통해 극대화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인준협약서에도 몇 년후 변경할 수 있는 단서 조항도 있습니다. 마음의 서움함도 많으실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세대를 세워가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제거하기위한 방편으로 기억해주시고 잠시 묻어두고 미래를 보고 나가시지요, 봄 정기 노회에서 설명할 기회를 주시면 수립된 교단 발전계획을 참석해 직접 보고드리겠습니다. 교단 로고도 참신하게 제작되었습니다. 보시고 의견을 개진해주세요. 노회장 연석회의에서 결정하겠습니다. 교단 신문인 기독연합신보가 창간됩니다. 인터넷신문은 20일 지문신문은 23일 첫 창간호가 나옵니다. 많이 애독하시고, 기도해주시고 축하해주시길 바랍니다. 정오의 기도를 선포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교단과 한국교회와 이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대신 교단을 세우신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정오에 모든 일정을 미루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만 팔천 동리에 우물을 파 민족 복음화에 대한 열정과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고, 복음으로 세워 영적 부흥을 이루는 일들을 이제는 우리가 이어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총회 산하 모든 노회와 교회와 성도님들은 매일 정오 시간에 모든 일손을 놓고 5분간 같이 기도합시다. 이제 우리 교단은 이 위기를 넘어서 회복과 부흥을 향해 매진할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교단의 동역자 목사님과 온 성도는 회복을 위해 한마음으로 달려갑시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합시다. 반드시 하나님은 회복과 부흥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울 한해 우리 총회는 예수 정신이 가득한 온전한 공동체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정신으로 한 교회라도 더 개척하고, 미자립교회를 자립교회로 만들고, 교단의 교회들이 초대교회와 같이 부흥, 성장케 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합니다. 특별히 저를 위해 특별한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주 보고드리겠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강건하시어 더욱 진액이 풍족하시어 감람나무와 같은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1. 3. 12. 대한에수교장로회총회 총회장 강대석목사 드림.
    • 오피니언
    2021-02-27
  • [신년사] 2021년 신축년의 새해가 새 소망과 기대 속에 힘차게 솟아올랐습니다.
    할렐루야! 2021년 신축년의 새해가 새 소망과 기대 속에 힘차게 솟아올랐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은 COVID-19의 팬데믹(Pandemic)으로 ‘비대면 예배’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만남은 어색해지고, 국경을 넘나드는 활주로에서는 비행기의 날갯짓 대신 먼지만 날리고, 정치・경제・사회・ 문화・의료계, 목회 현장의 활동이 멈추고, 모든 부분에서 인간의 무기력함만 앙상하게 드러낸 참으로 힘겹고 혼란스러운 해였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대신 목회 동역자 여러분! 황폐한 예루살렘과 고난을 겪는 시온의 백성을 위해 예례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애3:55~56) 한국의 예레미야 김치선 목사님도 혼란의 시대를 향해 ‘한국교회와 사회가 사는 길은 오직 십자가 복음뿐이라고’ 외치셨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남대문교회 6대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서울에서 처음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셨고 정오만 되면 식사 중이나, 강의 중에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정체성은 오늘 우리 대신인의 몸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대신의 동역자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무릎으로 외쳐야 할 때입니다. “28,000 동네의 우물을 파라”하신 뜻을 새겨,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기도의 용광로에 횃불을 지펴나가야 합니다. 팬데믹(Pandemic) 시대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개척, 애국, 기도정신으로 대부흥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가는 목양현장의 밀알이 됩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 밝아온 2021년에도 하나님은 우리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시고 승리의 함성만 울려 퍼지는 거룩한 목회현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2021년 1월 1일 대 한 예 수 교 장 로 회 총 회 총회장 강대석 목사 드림.
    • 오피니언
    2021-01-01
  • [총회장 목회서신]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코로나로 멈춰버린 일상으로 고통받는 동역자를 볼 때 아픈 가슴이 저며 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승리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반드시 회복되고 우뚝 서리라 믿습니다. 그간 교단의 통합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는데 안타까운 심정으로 머뭇거리던 마음을 비우고 교단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 후배님들의 고견을 경청하고 미래를 책임지고 이끌 수 있는 교단으로 세워갈 것입니다. 연말에 상임부서와 노회장님과 총회 임원과의 상견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깊어가는 코로나로 보류하고 있습니다. 신년에는 총회 상임 부서장님들과 우리 총회의 기둥인 노회의 임원 목사님과 총회 임원이 함께 신년을 하례하는 행사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어 실행위원회를 통해 우리 총회의 나갈 길을 열어가려고 합니다. 신학이 없으면 교단은 위축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총회는 호서대학과 인준을 준비를 마치고 대학원 커리쿨럼을 우리 총회에서 위임하여 교육을 통해 후배를 양성할 수 있도록 위임받았습니다. 그 외 다른 대학과의 MOU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우리 총회는 우리 신학으로 후배를 양성하는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4-5년 후에는 알차고 멋지게 다져져서 대한민국을 이끄는 대단한 총회가 될 것입니다. 총회도 슬림한 총회로 모든 권한을 노회에 위임할 것입니다. 상임위 및 부서장과 총회 임원은 카페에 공지하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이 만나고 싶었습니다. 총회의 카페가 오픈을 했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가입하셔서 함께 소통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대신총회] http://naver.me/GfZhCoAn 추후에는 카페에서 소통하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다시 복음 앞으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목양 이루세요. 기도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20년 12월 19일 총회장 강대석 목사 드림.
    • 오피니언
    2020-12-27
  • [총회장 목회서신] 기쁘다 구주 오셨네!!!
    사랑하는 총대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을 드립니다.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참으로 힘든 한해였습니다. 사역지에서 불철주야 애쓰신 목사님의 수고에 주님의 위로를 보냅니다. 총대 목사님들의 기도 덕분에 학교 문제와 재단의 문제도 잘 해결되었습니다. 밝아오는 새해에는 총회도 안정되어 좀 더 멋진 모습으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작지만 강한 총회, 노회 중심의 총회, 이만팔천 동리에 우물을 파는 선교하는 총회로 나가겠습니다. 또한 총대 대의원 목사님들의 소통의 장을 위해 카페를 개설했습니다. [행복한 대신총회] 네이버 카페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http://naver.me/5SUnzw8k 주님이 주신 성탄의 축복이 섬기시는 교회와 사역 위에 풍성하길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12월 10일 총회장 강대석목사 드림.
    • 오피니언
    20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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