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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5)
    5. 개혁파 신학의 확립 시대 왜 갑자기 김치선 박사의 역사를 말하면서 개혁파 신학을 들고 나오느냐? 라고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안양대학과 교단의 정체성에 대한 아주 중대한 이슈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역사를 되돌아 볼 때 대신교단이 그 역사를 여지없이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은 몸으로 비유할 때 가장 중요한 뼈대와 뇌의 조직에 해당한다. 겉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기관이지만 몸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신학은 현실 적용에 있어 전혀 무용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교리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신학이 비성경적이면 그 교회는 반드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마의 소굴이 되어버리게 된다. 오직 개혁파 신학만이 교회를 튼튼하게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교회의 역사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300여 년간 극심한 박해를 받은 교회는 사도신조를 중심하여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정통신학으로 확립한 후 중세를 지배하는 조직체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중세교회의 타락이 수많은 순교자들을 양산해 낸 후 종교개혁 신조를 탄생시키고 복음이 유럽을 기점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교단의 신학으로 지정한 것에 대하여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신이라는 이름으로 교단의 신학과 총회의 정치를 확립하신 분은 최순직 목사이시다. 1972년 제 7회 총회를 통하여 최순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그 총회장을 통해 1973년도에 이르러 교단 선언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최순직 목사와 조석만 목사 두 분이 함께 그 문장을 수없이 고쳐가며 다시 첨가하고 또 삭제하는 것을 반복 또 반복하였다. 그 내용의 전문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 서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우리 교단의 헌법은 장로회신조 및 정치원리를 따라 교회를 치리함에 있어 준용하여야 할 규범이다. 그런고로 우리 장로회 총회는 역사적 표준을 따라 헌법을 만들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 총회는 개혁주의 노선으로 교리체계를 확립하여 교회선언문을 채택하여 전국 교회에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개정 헌법이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마땅히 승인되고 준행케 할 법이 되기 바라며 또한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할 표준 법규가 될 줄 알아 이를 공포 발간하는 바이다.” 대신교단의 모든 신학과 정치체계를 구성해 놓고 최순직 교수는 1975년 연구차 임시 2년간만 체류하기로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후에 김세창 박사를 옹호하는 가족들은 최순직 교수로 하여금 아예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해를 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방배동 장종현 박사가 운영하는 신학교 교수로 청빙되어 가는 일까지 방해한 사실을 필자가 옆에서 볼 때 심히도 가슴이 아팠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최순직 교수는 꿈에라도 대신을 잊을 수가 없어 언제인가 돌아갈 생각을 품고 계셨다. 필자가 대한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로 청빙을 받아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 안양 석수동 대한신학교 특강 초청을 받아 한국에 들렀을 때 최순직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어떻게 하면 대신으로 다시 합류할 수 없을까? 하는 문제를 숙의하기 위해서였다. 최순직 교수께서 기회만 되면 대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와 대신의 중요한 인사들의 의견을 개진해 보았다. 이상하게도 모두 반대 의견을 내 놓았다. 알고 보니 최순직 교수가 돌아오게 되면 비 개혁파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총회에서도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게 됨으로 안 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거기서 대한신학교의 교리적 성장과 교단의 양적 성장은 어느 한 지점에 이르러 정점을 찍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최순직 목사의 사모 되시는 김동화 선생의 증언을 그대로 옮기면 “김세창 목사는 우리 가족을 미국으로 이민 가게 한 것은 사실상 대한신학교에서 최목사를 밀어내기 위한 공작이었다. 학교를 김세창 목사의 원대로 경영하기 위해서는 최목사를 내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2년이 지나도 최목사를 다시 초청하지 않고 김세창 목사의 측근들을 학교의 교직원으로 배치해 버리고 말았다.” 라는 것이다. 김세창 목사의 아버지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는 신학으로 이어져 근본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신앙화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최순직 교수는 교회사적 객관주의적 신앙고백주의에 기초한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 두 분의 신학적 대립은 대신의 신학적 혼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김치선 박사의 선교적 개척정신과 최순직 교수의 개혁파 신학이 공존 했으면 아마 한국에서 최고의 신학교와 교단으로 성장했다고 생각되어진다. 김치선 박사의 신학은 비록 근본주의적이라고 하지만 그분의 설교와 저서를 탐독해 보면 개혁파 신학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물론 당시에는 강한 세대주의적 요소를 주장하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하지만,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수학한 경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영향을 받은 김치선 박사는 강한 민족주의가 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김치선 박사의 선교정신과 최순직 교수의 개혁파 신학이 한세대가 지난 아들 대에 들어와서 접목을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양대의 신학적 좌경화는 교단의 신학적 미래를 예측하게 만들었고 대한신학대학원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은 교단의 신학적 미래와 교단정치의 미래를 예측하게 만들었다. 작금에 와서 교단이 여러 갈래로 찢어진 결과는 누구를 탓할 수 없다고 본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하면 다시 개혁파 신학을 정립하고 교단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가? 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합동측은 헤어졌다가 다시 합한 경험이 있고 통합측은 신학이 자유분방해도 정치적 공통분포를 잘 형성하여 전통을 유지해 나오고 있는 점을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타 교단의 우수한 신학교에 위탁교육을 보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개혁파 정신을 물려줄 수 있는 우리의 후예들을 키워야 한다. 같은 집안에서 자란 아들이라도 양자와 자신의 피를 받아 태어난 아들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개혁파 신학을 후예들에게 전수 시키는 방법은 우리의 힘으로 교단신학을 형성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영구적인 개혁파 신학과 교단을 유지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학위를 위해서는 미국의 우수한 개혁파 신학교와 연관을 가지는 길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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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7
  • [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4)
    4. 김치선 박사와 대신교단 사실상 김치선 박사와 대신교단은 깊은 관계가 없다. 교단 형성의 기초를 제공하신 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70년대 이전에 국가의 시책인 한 교단에 한 신학교를 원칙으로 운영하라는 정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ICCC와 관계하여 성경장로회의 교단을 창설하게 되었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교단을 탈퇴하기를 원치 아니했다. 여러 선교 단체에서 유혹의 손길을 내 밀었으나 대한예수교 장로교회의 목사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대한신학교 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다시 반복되고 말았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신학교의 기득권은 필연적으로 교단의 전통으로부터 빗나가는 역사를 반복했다. 교회역사는 신학적 문제로 학교와 교단이 갈라지는 일들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정치적 문제로 신학교와 교단이 갈라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중에 한 가지 사건이 바로 김치선 박사를 정치적으로 몰아 교단을 떠나게 한 사건이다. 그리고 후에 대한신학교는 ICCC와 결별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김치선 박사와 ICCC와의 선교적 방법론의 대립이었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신학교 중심으로 선교를 하려는 의도였으나 ICCC는 지방이나 개체적 단체를 통해 선교정책을 적용하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1968년 김치선 박사는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 대한신학교를 중심하여 독자적으로 교단을 건설해 나갈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대신교단을 설립하기 위한 새로운 발판을 만든 분이 김치선 박사의 둘째 사위 최순직 목사이시다. 당시 김세창 박사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대한신학교에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었다. 대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총회장이 되신 분은 최순직 목사이다. 1972년 4월 제 7차 총회에서 “성경장로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측”으로 명칭을 개정하고 최순직 목사께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본교단의 명칭과 사명” 이란 제하의 선언문을 신문지상에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한국교회는 교단직영신학교라는 경영체제에 강박관념화 되어 있을 정도의 교단신학에 집착되어 있다. 그러나 구미에서는 신학교가 교단의 정치제도아래 운영되는 교단직영 신학교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이다. 구미에서는 신학교들이 교단의 배경을 두고 운영하기보다 신학에 기초를 둔 사설학교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교단들과 인준관계를 형성하여 교류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리폼드(Reformed), 탈봇(Talbot), 카버넌트(Covenant), 그리고 비블리칼(Biblical) 신학교 등이 교단의 정치적 지배를 받지 않은 즉 사설 신학교들이다. 그 이유는 교단 정치에 의해 신학적 변질을 받지 않기 위함이다. 과거에 보수주의를 지향했던 하버드, 예일,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들이 교단과 관계를 가지고 서로 협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펼쳐 왔었다. 그러나 교단 정치가 들어옴으로 정치적 술수에 의해 몰래 물밑작업을 통해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을 학교에서 몰아낼 수 없는 지경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신학교는 교단 정치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교회사의 역사이다. 1920년대 메이첸(Machen) 박사는 프린스턴 신학의 좌경화를 막기 위해 몸을 던져 싸웠으나 결국 교단을 탈퇴할 수밖에 없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김치선 박사의 역사가 어쩌면 그와 비슷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김치선 박사는 신학교와 교단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시대를 앞서가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간적으로 교단설립보다 바른 신학교 설립이 우선되어야 그에 따라오는 교단이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 대한신학교는 그러한 역사를 김치선 박사에 의해 수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 노선을 걷고 있었던 대한신학교가 김치선 박사의 아들 대에 이르러 벧엘 기도원 땅을 판 대가를 가지고 종합대학을 세우려 하다가 오히려 경영난에 직면하게 되어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자에게 학교가 넘어가 버리고 이제는 타 종교의 재단에 학교를 인수 하느냐? 마느냐? 의 수치스러운 현상에 처해 있다. 대한신학교를 거쳐 온 사람으로서 대신출신이라는 신학의 명암을 내놓기가 부끄러운 형편이 되어버렸다. 1970년대 이후 대신교단은 장족의 발전을 하여 한국에서 장로교 교단으로서 5대 교단의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다. 짧은 역사를 가진 교단이 이렇게 큰 교단으로 성장하게 된 신학적 원인, 선교적 개척정신, 그리고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다시 대신교단이 여러 교단으로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 문제는 차후에 역사적 평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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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31
  • [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3)
    3. 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교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300만 전도운동의 전초기지를 각 지역에 마련하기 위해서는 “2,800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 는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이 민족과 국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기치를 들고 나왔다. 이일을 위해서는 중심을 잡고 일하는 사역자가 요구되었다. 우선 70인의 전도 목사를 선정하여 전국에 파송하는 사역이었다. 이를 위해 신학교육을 받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은 사역자가 필요했다. 1948년 8월 서울 남대문 교회에서 야간 신학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그 야간신학교가 대한신학교로 그리고 안양대학으로 전이되기 이전의 연역을 요약한 것이다. 1948년 8월, 남대문 교회에서 야간 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윤필성 목사 취임. 1949년 1월, 서대문구 서소문의 새 건물로 이전하고 2대 교장에 김치선 박사 취임. 1950년 1월, 대한신학교로 개명. 1950년 5월, 제 1회 졸업생 18명을 배출. 1952년 9월, 4년제 각종 대학교로 인가 받음. 1956년 9월, 서울 중구 남산동 소재 교사로 이전. 1962년 3월, 서울 용산구 서계동(현 청파중앙교회) 교사로 이전. 1964년 4월, 학교법인 대한기독학원 인가 받음. 1966년 9월, 4대 교장에 김세창 박사 취임. 1968년 2월, 김치선 박사 별세(69세). 1969년 7월, 군종장교 후보생 지정학교로 인정 받음. 1977년 11월, 안양시에 15,000평 교지매입. 1980년 10월, 5대 교장에 이의완 박사 취임. 1985년 6월, 최순직 박사 학교 재단 이사장 권한대행 취임. 1985년 7월, 이형룡박사 교장 직무대행 시작. 이후에 학교는 빚에 시달리다가 채권단들에게 학교를 넘겨주게 되고 김세창 박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학교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채권단들은 당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당시의 천문학적인 빚 25억원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학교를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최순직 교수와 그분의 아내 되시는 김치선 박사의 둘째 딸 김동화 사모께서는 소나기처럼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께서 세우신 신학교를 자유주의 영역에 넘겨주다니... 하시며 넋을 잃고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대신교단이 설립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과정이 있다. 원래 대한신학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야간신학교로 출발하였다. 1948년은 한국교회사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신학교들에 관한 사건들이 일어난 해이다. 해방 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한 김재준 박사와 동정녀 탄생을 옹호한 박형룡 박사 사이에 일어난 두 신학자들의 갈등은 신학교의 분리는 물론 교단의 분리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서울 창동 교회에서는 1948년 5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총회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같은 해 대한신학교 모체인 총회신학교 야간신학교가 개설되었다.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 설립된 조선신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의 모체가 되었고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신학교가 되었다. 신학이란 이름으로 성경의존사상을 신앙하는 신학을 거역하는 묘하고 잡다한 단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한신학교가 자유주의자의 손에 넘어간 가장 기초적인 원인은 교회사적 정통주의 개혁파 신학을 강조한 최순직 교수를 대한신학교에서 배제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세창 박사는 대한신학교의 신학적 노선이 제기 될 때마다 항상 그분은 개혁파 신학에 대한 다른 의견을 개진하였다. 개혁이란 말을 꼭 근본주의에다 대입시켜 다른 견해를 첨가하였다. 같은 보수주의 노선인데 왜 개혁신학만을 강조 하느냐? 는 주장을 내세웠다. 최순직 교수는 가장 객관적인 교회사적 신앙고백에 의존하지 않고 김세창 박사가 무조건 부친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일방적인 근본주의에서 떠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최순직 교수는 김치선 박사의 공로와 당시의 김치선 박사가 처한 시대 상황을 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이해하면서 개혁파 신학으로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확정 시키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세창 박사는 무조건 아버지의 사상에만 집착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고 강의 시간마다 개혁주의라는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 다시 해방 후의 역사로 돌아가 보자. 1948년 5월 20일 조선신학교와의 갈등으로 창동교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총회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즉 자유주의와 절연하고 참다운 성경중심의 신학교를 세우자는 취지였다. 이 사건은 신학이 단순한 신학의 개념만을 의미하는 역사가 아니었다. 신학은 교회의 앞날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교단의 미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당시의 교수들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권세열, 겸임으로 한경직, 명신홍, 그리고 이자익 목사 등이었다. 그런데 1948년 같은 해 야간 신학교를 개설하게 된 것은 이미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의 독립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총신과의 갈등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간으로 운영하던 대한신학교는 김치선 박사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여 총신 본교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모이고 있었다. 졸업생들도 교회개척의 앞잡이가 되어 각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구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1957년을 계기로 하여 장로회 총회에서는 대한신학교를 장로회 총회신학교 야간부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기에서 김치선 박사는 “지금까지 여러 교파에서 보조를 조건으로 자기들의 교단신학교로 운영하자는 수많은 제안을 거절해 왔는데 이제 와서 총회신학교 야간부로 편입할 수 없다.” 고 생각하고 1957년 여름에 40일 작정기도에 들어갔다. 대한신학교는 김치선 박사의 생명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한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갈등이 증폭되어 갈 때 총회측에서 김치선 박사의 신학을 시비 걸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것은 개혁파 신학이 아니고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점이다. 당시 총신측에서도 다수의 목사들이 근본주의 사상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타인을 흠집 내기 위하여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타인의 흠집만을 들추어내는 사악한 일을 행한 것이다. 결국 대한신학교는 독립적으로 운영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적 배경도 없고 졸업생들은 총회에 가서 안수를 받고 사역지를 구할 수 있는 길이 막막했다. 더구나 당시 정부의 방침이 하달되었는데 하나의 신학교는 하나의 교단을 배경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근본주의를 강하게 추종하는 ICCC 총재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와 연관을 맺어 성경장로회라는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1961년 6월 21일 제 1회 창립총회를 열고 초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를 선출하게 되었다. 이후에 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교는 더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한신학교와 한양교회와의 갈등에 더하여 정부와의 소송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한양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김치선 박사는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2,500평의 땅을 취득하여 대한신학교를 같은 장소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교회는 교회대로 땅을 많이 차지하려고 하고 학교는 땅을 분할하여 양쪽이 똑 같이 차지하겠다는 충돌이 일어났다. 더불어 당시 정부의 방침은 그 땅에 KBS 서울 중앙방송국을 세우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당시 공보부 장관이었던 오재경씨는 기독교 장로로서, 그의 부친이 김치선 박사와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정부의 편을 들어 방송국을 세우겠다고 통보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국가에서 이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정부를 상대로 송사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양교회와 대한신학교는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하지도 못한 채 9년에 걸친 정부와의 소송에 일방적으로 밀려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때 ICCC 총재 맥킨다이어 박사의 도움으로 용산구 서계동 33-2, 구 쏘련 영사관 자리인 현재 청파 중앙교회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한 가지의 작은 인간적 갈등은 후에 극심한 분열을 일으킨 인류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신학적 사상은 더욱 그렇게 되어 온 교회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근본주의냐? 개혁파 신학이냐? 의 신학적 이슈는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에 있어 1970년대 이전에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신학적 이식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1970년대 이전에는 한국교회가 근본주의냐? 개혁파 신학이냐? 의 갈등이 없었고 서로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에 한국교회 안에 개혁파 신학이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무천년주의가 확산되고 언약론이 확대되고 또 다른 세력인 번영신앙이 기성 교외의 틀을 흔들기 시작하면서 신학적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제도는 장로교회로 신학은 개혁파로 교단의 정치와 대한신학교의 교리를 정립하려는 기치를 들고 나온 분이 최순직 목사였다. 이러한 기치를 정립하기위해 한 가지 정리해야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찾아온 ICCC와의 결별이었다. 최순직 목사는, 그분의 식구들은 물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계동33-2의 땅을 마련해 준 ICCC로부터 파송된 마두원(馬斗元, P.R. Malsbury) 선교사를 찾아가 그 땅의 원금을 갚았다. 그 돈은 학교를 잘 운영하여 조금씩 저축한 것이었다. 마두원 선교사는 그 원금을 받아들고 너무 기뻐하면서 “평생에 한국에 와서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제 대한신학교는 홀로 서는 길이 남아 있었다. 피눈물을 쏟아 대한신학교를 건설해온 김치선 박사, 최순직 교수, 그리고 그 주위의 인물들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대신의 신학이 좌경화 되어 안양대학으로 변질된 현 상황을 보고 땅을 치며 숨이 넘어갈 입장일 것이다. 우리는 개혁파 신학을 주장하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교수들의 견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신학의 변질을 막아야 한다. 그 신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는 신학교는 절대 성경의존주의 신학만을 중심으로 학교를 경영해야 한다. 신학 이외의 일반대학을 유치할 경우 신학이 좌경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미국의 하버드, 예일,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가 처음에는 아주 건실한 복음주의 신학을 기초로 하여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일반대학의 유치로 말미암아 신학이 좌경 되었다.” 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또 강조하기를 “그래서 지금 모든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들이 일반대학을 배제하고 신학대학원(Theological Seminary) 제도와 성경 대학(Bible College) 제도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 절대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하고, 교단의 정치를 배제하고, 그리고 일반대학 유치를 배제해야 올바른 신학을 유지할 수 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돌이켜 보면 안양대학이 과거 유럽과 미국의 자유화 된 신학교의 전철을 밟아왔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학의 변질은 보통 80년을 넘지 못하고 보수주의 신학이 퇴락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20기에 들어오면서 미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인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으로 인하여 곤욕을 치룬 후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들은 거의 모두가 교단의 정치적, 재정적, 그리고 연합이라는 명분을 버리고 단독적인 사설 신학의 경영을 유지해 오고 있다. 오직 신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미국의 보수주의 개혁파 신학교들은 100년이 넘어서는 현 시점에서도 신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으며 교회는 복고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순직 교수는 70년대 들어와 이제 대신은 대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대신의 황금시대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교단의 명칭도 대신으로 정정하여 명명했다. 이제 대신의 김치선 박사와 교단과의 문제를 잠간 언급해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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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5
  • [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2)
    2. 김치선 박사의 신학적 배경 김치선 박사의 신학을 정의하는 여러 목소리들을 감지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객관적 배경을 무시하고 상당히 주관적 평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첸 박사의 수제자, 정통 개혁파 신학자, 그리고 가장 보수적인 신학의 근본주의자. 등등의 평가이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신학적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분은 1970년대 대한신학교의 개혁파 신학의 흐름을 주도한 김치선 박사의 둘째 사위 최순직 교수와 그의 아들 김세창 박사의 견해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분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김치선 박사를 모셨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김치선 박사가 근본주의 신학을 표방하였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개혁파 신학을 부분 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분들이 그러한 공통점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또 다른 갈등의 요소를 표출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무조건 부친의 근본주의 신학을 수용하려는 김세창 박사와 교회사적 개혁파 신학을 수용해야 지속적이며 객관적인 신학을 수립할 수 있다는 최순직 교수와의 신학적 갈등이 저변에 숨어 있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중요한 언급이 있다. 안양대학의 신학적 변질을 분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1975년 최순직 교수가 연구차 미국에 들렀을 때를 이용하여 김세창 박사는 비개혁파 교직원들을 대한신학교에 배치하여 버렸다. 그 후로 신학교 내에서의 갈등은 심화되어 각 주장하는 부류마다 자기들만 옳다 하여 잠잠한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한편으로 김세창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한국 최고의 종합대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대한 꿈을 외치고 다녔다. 어느 국가이든 또는 단체이든 내부에서 혼란스런 일이 발생할 때는 힘을 발휘하는 곳으로 사람들이 쏠리게 되어있다. 그 힘의 원천은 사람들의 조직, 경제적 실권, 그리고 정치적 우위 등이다. 결국 대한신학교는 경제적 힘과 교육부의 배경을 바탕으로 종합대학이 되어 안양대학으로 변해 버렸고 보수주의 신학은 자취를 감추어 가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어떤 분은 개혁파 신학도 근본주의 신학도 보수주의 신학인데 서로가 공통분포를 형성할 수 없다는 말인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두 부류의 신학은 보수주의 신학으로 명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 현미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본주의 신학은 너무나 단순하고 지엽적인 신학에 한정되어 있다. 그 신학의 주제는 성경의 무오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육체적 재림이다. 이 5가지 신학의 주제는 19세기 유럽의 고등비평주의와 종교혼합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의 반동으로 일어난 교리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다섯 가지를 따로 분류하여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신학적으로 절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이 주장하는 신론, 인간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엽적인 신학을 강조하게 될 때 그 신학이 불원간에 주관화 되어 자유주의로 기울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세기 초엽 근본주의 운동의 뿌리가 되었던 5가지 교리는 1930년대 들어와 절정을 이룬 후 1950년대에 들어와 신근본주의(Neo Fundamentalism) 운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신근본주의 운동이란 강한 주관적인 입장과 더불어 성경의 문자주의를 내세우며 분리주의에 열을 올리는 운동이었다. 근본주의의 극단적인 주관주의 신학운동은 1948년에 WCC를 강력 대항하기 위해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를 중심으로 ICCC를 조직함으로 시작되었다. WCC를 대항하는 운동은 잘 한 일이나 ICCC 단체 이외의 어떤 보수주의 신학은 물론 개혁파 신학까지도 정죄해 버리는 분리적인 일에만 피켓을 들고 나온 운동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지엽적인 신학 운동은 결국 신복음주의로 떨어져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신학계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근본주의의 두 가지 신학적 문제점을 발췌해 보면세대주의적 요소와 일반은총론의 배격이다. 세대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달비(John Darby)와 20세기 초 스코필드(Cyrus Scofield)에 의해 시한부적 전천년주의를 강하게 강조하는 역사적 종말론의 신학이다. 계시록 20장의 천년 기간을 문자적으로 보고 일반 역사와 구별된 획기적인 기간으로 인정하는 신학적 입장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신학적 입장은 일반은총의 배격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그리고 과학 분야를 세상의 일로 취급하고 죄악시 하는 경향성을 드러내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 사상이다. 즉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영역과 사탄의 영역을 대립적인 관계로만 취급한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탄의 영역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응용하시는 허용적 섭리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1920년대 당시의 미국 보수주의 운동은 웨슬리안적 보수주의, 개혁파적 보수주의, 그리고 기타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의 총 집합체를 형성하여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 대항의 원인은 자유주의자들이 제공했다. 그 자유주의자들은 당시 말도 되지 않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고 나왔다. 상식 이하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신학을 주장하며 성경을 난도질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극단적인 성경 배타주의를 역공하기 위해 미국의 복음적 요소를 소유하고 있는 교회들이 하나의 집합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그 대응전략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신학적 입장인데 하나는, 종말론에 대한 강렬한 신학적 입장과 또 하나는, 합리적이며 과학적 입장을 공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반은총에 대한 배격이 발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많은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온 시기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이었다. 너구나 이러한 근본주의 사상이 가장 활발하게 성행하였던 1930년대 김치선 박사께서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하나의 비화를 소개하면 김치선 박사는 그분의 딸이 교회 행사에 참여하여 율동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너는 잡년이다.” 라는 말을 하셨다는 사건은 그분이 얼마나 일반은총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김치선 박사가 병중에 눕게 되어 오래 동안 침대의 신제를 면치 못하게 되었을 때 온 가족들에게도 TV를 시청하지 못하게 하시다가 너무 무료한 나머지 TV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일화는 그분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저술한 구약사기(The History of the Old Testament)를 살펴보면 구약 역사의 시대적 분류법이 언약론이나 하나님의 주권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 세대주의적인 요소가 깊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나타난 구약의 인물들과 사건들의 발췌는 구약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신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물론 처음 신앙의 세계에 들어온 초 신자라도 그 깊이와 넓이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유효한 저서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냉정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시대의 아들임을 벗어날 수 없다. 1920년대 이후 당시 미국에서는 개혁파 신학의 영역에 속해있는 자들은 물론 웨슬리안주의적 복음주의 자들까지 합세하여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교리적 전쟁을 하는 시기였다. 5가지 신학적 이슈(성경의 오류 주장, 동정녀 탄생 부정, 대속적 죽음 부정, 부활 부정, 그리고 육체적 재림 부정)를 들고 나온 자유주의자들과 교리적 전쟁을 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이 때 김치선 박사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연히 당시의 사상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와 1914년 이후 30년 어간에 세계 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치렀던 세계는 온통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피안을 세계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천년왕국설이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특히 당시 한국교회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거의 근본주의적 천년설을 주장하는 분들이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사경회에 참석하면 거의 모든 강사들이 역사적 종말론에 있어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를 설파하는 설교를 들었다. 오늘날의 신학적 입장을 고려해 볼 때 보수주의 영역 안에서 역사적 전천년주의, 후천년주의적 육체적 재림론, 그리고 무천년주의적 재림론 등이 상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시대적 아들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교회론에 있어 당시의 로마 캐톨릭과 제왕들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정교하게 정립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대입해 보면 너무나 원시적인 신학의 피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칼빈의 신학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당시 엄두도 낼 수 없는 정교분리를 주창하고 나선 일은 그 천재성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그가 남김 업적은 너무나 지대하다. 당시의 근본주의 운동과 한국의 정세로 볼 때 하나님을 신앙하는 민족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실행하는 운동이었다. 매 맞고, 투옥되고, 그리고 가족이 흩어짐을 당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운동이었다. 그런 면에서 김치선 박사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개혁파 신학의 정통성을 유지해야 미래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신앙적 유산을 남겨줄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성장에 있어 월등한 방법론이나 특별한 사회적 이슈를 적용하면 일시적 부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남겨놓은 교회사적 신앙고백의 노선을 버리게 되면 언제인가는 교회가 타락의 길을 면지 못하다는 것이 역사의 증명이다.
    • 오피니언
    • 특별기회
    2021-03-20
  • [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1)
    서 언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의 원조가 되신 분이다. 그분의 역사를 탐구하고 되새겨 보는 일은 앞으로 대신의 역사를 가름하는 중대한 지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는 시공간의 사건에 기반을 두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주권적 해석이 적용될 때 올바른 역사관을 소유하게 되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재산이 된다. 일방적 자기주장을 단편적으로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교회가 걸어온 역사에는 교리적 배경이 시대적으로 나열되어 왔다. 그것이 교회사적 신학이다. 교회사를 뒤돌아보면 역사의 아이러니(Irony)가 지속되어 온 것처럼 느껴진다. 대신의 역사를 되새겨 볼 때 교회사의 한 단편이 나타난 것처럼 느껴진다. 교단의 역사는 교회사적 신학에 기초한 교리교육이라는 반석 위에 정치적 제도를 튼튼하게 세워갈 때 지속적으로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게 된다. 그것이 교회사가 증명한 역사였다. 대신교단이 그 교리교육에 기초하여 교단을 형성해 왔는가? 김치선 박사의 노고를 뒤돌아보고, 당시의 역사를 가감 없이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대신의 역사를 정립하는 작업이 절대 필요한 시점이다. 절대 단편적으로 그분의 애국운동과 그분의 보수적 신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신구약의 교회사적 기준을 통해 당시의 역사를 해석하고 미래 지향적인 신학적 그리고 정치적 역사관을 형성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1. 김치선 박사의 생애 김치선 박사는 1899년 8월 10일 김영준씨와 최현숙 여사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그를 가르쳐 준 김응보 선생이 영수로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선생으로부터 전도를 받았고 또한 같은 서당에 다니던 영특한 이홍순이라는 여자 학생 역시 전도를 받고 함께 성경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치선 학생은 후에 이홍순 학생과 결혼하게 되었다. 김치선의 부친 김영준씨는 어업을 경영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나 그 가족에 고난의 회오리가 닥친 것은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되고 부터였다. 40여척의 배와 함께 배에 탄 어부들은 폭풍으로 말미암아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치선의 할아버지는 생명을 잃은 가족들에게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김치선의 가족들을 오막살이 집에 남겨놓고, 영흥으로 돈벌이를 위해 떠났다. 그러나 그는 3년 후 극심한 고생으로 세상을 떠나고 치선의 아버지 영준씨는 1916년 온 가족과 함께 함경도 장진의 화전민으로 들어가 산지를 일구며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함흥에 카나다장로교 선교사 영재영(L. L. Young) 목사가 화전민들이 살고 있는 서호리에 복음을 전하려 왔다. 영재영 선교사는 영특한 소년 김치선을 보고 자신이 데리고 가서 키우겠다고 말했다.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치선을 데리고 와서 가정의 일을 시키며 학교를 다니게 했다. 당시 카나다 선교사들은 다수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기반을 둔 독일의 문서설을 지지하는 신학을 함경도에 거점을 두고 전파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어 김치선에게 전파된 복음은 보수주의 신학에 기반을 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정통주의 신학이었다. 그것은 김치선을 미국에서 보수주의 신학을 공부하도록 주선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영 선교사는 후에 김치선에게 공부할 신학교를 추천할 때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추천해 준 것을 보면 그의 신학적 입장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치선은 1933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치선 박사가 영생중학교를 다닐 때, 지금의 학제로 고등학교 3학년 나이에, 1919년 3.1 운동일 일어났다. 그도 그 운동에 가담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당했다. 그리고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했다. 아마 김치선 박사의 강한 민족주의 애국운동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생을 12시 고동소리와 함께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수시로 눈물을 흘린 삶은 민족과 국가를 위한 그의 심정이 어떠했느냐를 대변해 주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목회할 때 내선일체에 맞도록 한국말로 설교하지 말고 일본어로 설교해야 한다는 정책에 반항했다는 죄목으로 1940년 왜인들의 경찰에 체포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가끔 김치선 박사의 설교 녹음을 듣게 될 때 긴장되는 것은 그분의 한국민족을 향한 애절한 외침과 눈물이 언제 터져 나오느냐? 이었다. 그 같은 느낌이 들자마자 목소리가 높아지며 눈물로 호소하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설교가 시작되고 약 5분이 지나면 목이메인 외침이 시작되었다. 왜인들에게 당한 한국 민족의 한이 깃들어 있었던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아마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고 제자들에게 호소하면서 국민의 11조 300 만 성도를 달라고 기도한 신념이 여기서부터 나온 것이다. 복음화 운동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분이 순교자 손양원 목사와 절친하게 지냈던 일도 미루어 보면 민족 사상이 깊이 깃들어 있었던 연고로 생각되어 진다. 손양원 목사와 300만 전도운동을 함께 한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비화를 언급할 것이 있다. 김치선 박사는 손양원 목사를 모시고 남대문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총살한 안00이라는 살인자를 아들로 삼아 부흥회에 데리고 오셨다. 남대문 교회 앞에 세계의 성자 손양원 목사 라는 포스터를 크게 써서 매달았다. 그때 손양원 목사는 그 포스터를 떼지 않으면 부흥회를 인도할 수 없다고 우겼다. 하는 수 없이 그 포스터를 걷어내고 부흥회를 열게 되었다. 지금도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인 여수 애양원에 가면 손양원 목사와 김치선 박사 두 분이 다정하게 앉아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김치선 박사가 한국에서 활동한 거점은 남대문 교회와 대한신학교이다. 당시 남대문 교회는 교통이 원활한 서울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갈라지기 전에 전국에서 영락교회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선생이 자주 출석하기도 했다. 1948년 8월에 야간에 공부하는 대한신학교를 남대문 교회에 창설하였다. 초대 원장에 윤필성 목사가 취임하였고 뒤이어 1년 후에 김치선 박사가 취임하였다. 북에서 남으로 넘어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신학교였다. 이 학교가 대신교단을 설립하는 모체가 된 것이다. 교단은 신학과 정치적 일치를 통해 형성된다. 그 신학을 형성하는 모체가 신학교이다. 신학교의 노선은 교단의 신학을 결정하는 뿌리이다. 구미의 역사가 그랬다. 신학교의 자유주의화는 교단의 멸망을 촉진하는 원인이다. 교회의 문제는 신학교의 문제로 연결된다. 신학교의 문제는 이사진과 교수들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사진과 교수들이 돈과 자신의 영예만을 위해 정치를 일삼을 때 신학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럴 때 학생들은 성경에 기초한 신학을 배울 수 없다. 후에 그들이 남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정치에 매진하게 된다. 6.25 전쟁이 휴전됨에 따라 서울에 평화가 깃들고 대한신학교를 다시 개강하게 되자 학생들이 날로 늘어가게 되었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다시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신학교 7회와 8회에 학생 수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때 졸업한 학생들이 졸업 후 교계의 각계각층에서 많은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1954년 김치선 박사는 기도에 열중하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도원 자리를 찾아 나섰다. 지금의 서울대 자리에 벧엘 기도원을 세웠다. 당시 많은 대한신학교 학생들이 시간이 나는 대로 관악산 벧엘 기도원을 찾아가 기도에 몰두한 적이 수없이 많았다. 더불어 김치선 박사에게 닥친 환란은 겹치고 또 겹친 사건들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대한신학교 건물과 한양교회(창동교회를 개명)의 화재로 전소된 사건,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양회에 가서 7명이나 익사한 사건, 그리고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법적 다툼 등이었다. 6.25 남침으로 인하여 피난 중에 남대문 교회는 다른 목사가 와서 목회하게 되자 김치선 박사는 한양교회를 새로 설립하고 남산 2,500평의 땅위에 세워진 일제 때의 신사(神社) 건물을 매입하여 교회와 학교로 사용하던 중 1956년 어느 날 새벽에 신학교와 한양교회가 전소된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김치선 박사는 충격을 받아 병중에 눕게 되었다. 남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건물은 전소되고 땅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폐허된 땅에 임시로 대형 콘세트를 세워 신학교와 교회를 함께 사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속적으로 일어난 마찰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부가 대한신학교와 한양교회가 사용하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한 결과 벌어진 소송과 더불어 정부의 시책이 발표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신학교는 하나의 교단을 배경으로 하여 운영하라는” 것이었다. 대한신학교는 1952년 4년제 각종 대학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교단과 관계를 가져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대한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의 야간 신학교로 운영을 해 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단독 교단을 만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김치선 박사는 당시 근본주의의 선두주자였던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의 총재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와 연관을 맺고 1960년 성경장로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1966년 김치선 박사는 암스텔담에서 열린 ICCC 국제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다. 그것이 국제대회에서의 마지막 강단이었다. 잠시 미국에 들러 필라델피아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쉬고 귀국하려던 참이었다. 거기서 갑자기 쓰러져 전신을 쓰지 못한다는 통보가 한국으로 날아들었다. 언어도 쉽게 구사할 수 없었고 대소변도 자유롭지 못했다. 머리에 혹이 생겨 미국에서 8시간이란 긴 수술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날로 쇠약해져 갔다.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최순직 목사를 귀국하도록 하여 신학교를 돕게 하였다. 최목사는 어느 정도 학교의 급한 일을 수습한 후에 다시 학업을 마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급하게 25세의 젊은 나이로 김치선 박사의 외아들 김세창 박사가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김치선 박사는 1967년 12월 21일 이사 최용찬 장로와 김세창 교장을 불러 마지막 회의를 주관했다. 1968년 2월 24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김치선 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쉼을 누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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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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