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6-1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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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상 목사

김치선 박사는 1899810일 김영준씨와 최현숙 여사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8224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김치선 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쉼을 누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김치선이 남대문교회에서 어떠한 사역을 하였으며,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김치선이 선택했던 결정과 복음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박태선과의 관계를 갖게 되는 과정과, 김치선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재일교포를 위하여 어떠한 선교사역을 하였는지를 살펴보려한다.


1장 남대문교회와 김치선 목사

19445월 일본에서 돌아온 김치선 목사는 서울에 있는 남대문교회의 제 6 대 목사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 당시 남대문 교회는 교통이 원활한 서울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갈리기 전에 전국에서 영락교회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선생이 자주 출석하기도 했다. 손양원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시고 300만 구령운동을 남대문 교회를 중심으로 일으켰다. 김치선 목사님은 부임하면서부터 새벽기도회를 계속하였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였다. 김치선 목사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1944년 당신의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었는데 김치선 목사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이 서울에서는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회였다.

김치선 목사는 그 암담하고 어수선한 시기에 매일 새벽제단을 쌓으며 강단에서 엎드려 민족을 위하여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는 매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때부터 그를 조국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렀다.

김구 선생은, 김치선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던 남대문 교회의 교인이었다. 따라서 김구 선생과 김치선 박사는 각별한 사이일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선생은 매 주 한 번씩 김치선 박사를 집으로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김치선 목사와 신앙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또 그의 아들 김신(金信)씨의 결혼식 때에도 그 주례를 김치선 목사에게 부탁하였다.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 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해방된 기쁨의 눈물, 자기 과거에 대한 회개의 눈물, 우리 민족을 향한 구원의 문제, 한국이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남대문교회는 귀환 동포들의 안식처이자 소식이 끊어진 친지들의 행방을 알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역에서 내려 찾아드는 그들에게 교회는 뜨락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삼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이만팔천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그의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박태선장로와의 관계는 그의 지도력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하였다.

 

1. 삼백만 부흥운동의 전개

 

1907년 대부흥의 물결이 2-3년 지나자, 부흥의 열기가 차차 식기 시작하면서 교인들의 열성이 기울기 시작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일제가 기왕에 시작하였던 한국 식민지화를 가속화하더니, 급기야 19108월 한국을 강점 병합하여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따른 사회의 불안과 모든 사람들의 좌절을 보면서, 교회는 이런 때에 낙담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을 일깨우면서 교회의 부흥운동을 재개하게 되었는데, 이 운동이 곧 100만명 구령운동이었다. 1909년부터 1910년간에 백만명 구령운동 (Million Souls Movement)이 전개된 일이 있었다. 백만명 구령운동은 1909년에 개성에서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 (M. B. Stokes), 갬불 (F. K. Gamble), 리이드 (Miss W. T. Reid) 3인이 다시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당기기 위해 사경회와 기도회를 한 주간 동안 갖기도 하고, 한국 교인 몇 사람과 함께 산상기도회를 개최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도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은 19099월에 개최되었던 남감리교회 연차대회에 참석하여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하는 표어를 채택하도록 요청하여, 이 표어가 채택되었다. 이 연차대회가 폐회한 후 바로 열렸던 복음주의 선교연합공의회 (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위의 3인 선교사들은 이 공의회의 전도 목표를 채택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백만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100만명 구령운동이 정식으로 출범을 하게 된 것이다.

 

1910년 선천에서 모인 장로회 제 4회 독노회에서도 100만명 구령운동에 적극 참여키로 의결하고, 7대리회에서 특별위원을 선정하여 이 일을 추진하게 하였으니, 이날이 한국이 일제에 병합된 지 꼭 20일이 지난 때였다. 이 운동은 한국에서 전도를 위해 남녀노소, 신자들과 학생, 평신도와 교역자들이 전심전력하여 이 표어의 구현에 노력한 전국적인 운동이었다.

 

전국의 각 교회가 연합하여 백만명전도회를 조직하고 각 지역 교회의 유력한 교역자들이 먼저 서울에 모여 1개월간 시내 전역에 축호전도를 함으로써 귀도자가 많았고 이로부터 전국 각지를 분담하여 계속 전도함으로써 많은 수확을 얻었다.

 

김치선 목사가 백만명전도운동에 영향을 받아서 삼백만 부흥 운동을 일으키던 때는 1946년이었다. 해방 이후의 정치적인 혼돈기였다. 당시 남북한 전체인의 인구가 3천만이었으므로 십일조에 해당하는 3백만이라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보자는 취지 아래 삼백만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 달에 한번씩 초청 강사의 부흥회를 가졌는데 박재봉, 손양원, 배은희, 김인서 등을 강사로 하여 금식과 철야기도 운동을 벌였다 (배명준 목사와의 대담, 1978819일 재인용). 삼백만 부흥운동을 시작할 때 세 가지 중점목표를 가지고 진행되었는데 첫째 성령운동, 둘째 말씀운동, 셋째 회개운동이다.

 

당시 남대문교회 주일 학교는 교사 김성섭, 이의환, 김영정, 박동윤 등이 인도하였는데, 어린이 전도대원들은 북을 치고 나발을 불며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가 서울역 앞과 공원에 모인 군중들에게 복음을 외치면서 전도지를 배포하였다. 청년들로 구성된 전도대원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공창지역인 묵정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공창 폐지를 외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 곳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19505월 중순 6.25가 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남대문교회 청년들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대한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삼 백만 부흥운동의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70여명의 전도대원들은 당시 공산당들의 출몰이 잦았던 38선 접경지대와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인하여 패잔병 공비들이 있던 지리산 지역과 제주도 한라산 일대에 복음전파의 사명감을 갖고 전도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전도대원들은 6.25로 인하여 대부분 선교지에서 순교를 당해야 했고 지금도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들 결사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의환 목사의 경우 6월 상순경에 38선 지구에 파송을 받았다. 개성지구, 연백지구, 옹진지구로 3조가 파송되었는데 마지막에 옹진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는 개성으로 가서 전도집회를 일주일간 갖게 되었다. 낮에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며 노방전도를 하였는데 시장에 가서 전도지를 뿌리면서 전도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전방 참호 속에 들어가서 대북방송을 하기도 하였는데 전도 설교를 하면서 찬송을 부르기도 하면서 흘러간 노래들을 불러주기도 하였다. 또한 군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에게 전도하였다. (이의환 목사의 증언, 기독교 방송 한국의 교회에서 방송, 1979128). 이들 전도대원의 가슴속에는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서로 반목질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으며 어서 속히 복음을 하나가 되어야 되겠다는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후 1962년에 이르러 삼백만 부흥운동의 결사대로 공비들이 출몰하던 지리산 지역에 파송받았던 대원 중 정관백 전도사가 공산군에 의하여 순교하였음이 밝혀져 남대문교회가 지리산 지역인 구례군 산동면에 비석을 세워 그를 기념하였다. (19621121일 당회록). 산동교회의 사연은 너무나 처절한데 일명 과부교회로 불리우리 만치 동란을 겪는 동안 교회의 남자는 모두 목숨을 잃어 버렸다. 그리하여 여자의 손으로 나무를 찍어다가 예배당을 지었는데 남자라고는 60세가 넘은 영수 한 사람 마저 건축자재를 사서 싣고 가다가 소달구지가 뒤집혀 죽고 말았다. 이곳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산불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여인들만이 사는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이 곳에서 염명수 목사가 고아원과 자모원을 하였다. (배명준 목사와의 면담, 1979819).

 

채기은은 삼백만 부흥운동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해방 후 민족 전체가 국가발전에 열중하고 있었느니 만큼 삼백만 부흥운동은 크게 호응을 보지 못하였었다고 하였다. 사실 이 운동이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대중집회를 한다든지 초교파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려는 강한 도전을 받고 사명감에 충만한 사람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는 한국교회사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2. 2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

 

삼백만 부흥운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사역은 2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사명이었다. 증경총회장인(12) 신현기 목사는 말하길 2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것은 개척자의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정신이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실에 신학교를 졸업 한 후 부교역자나, 교회청빙을 기다리기보다는 나아가서 교회를 개척하며, 특히 교회를 개척할 때는 다른사람이 가지 않는 벽고지나 농촌, 어촌, 등으로 가도록 권장하였다. 이어서 말하길 김치선 목사야말로 개척자의 삶은 살아 온 증인이었기에 이와같은 부르짖음이 가능하였다. 대한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당연히 교회개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심지어 학교에 재학중에도 개척교회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였다. (신현기 목사와 대담 2001517)

 

1950년대에 우리 민족은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수난과 궁핍과 처절한 생활고를 해결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다시 번영할 수 있는 비결을 영적 운동에서 찾았다. 김세창 박사는 그의 책 빛을 향하여에서 이 우물파기 운동이 영적으로 전개되어 김치선 목사 생애에 3천여 명의 제자를 내고 목숨까지 바친 마지막 운동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다시 말해서 동네마다 우물을 파는 운동이니 대한민국을 통틀어 28천여 동네였다. 마당에 우물을 파고 이 우물로 교회를 세우는 운동이다. 동네마다 우물인 교회가 세워지니 심령이 변화되어 예수 믿고 변화 받아 영생의 자리에 들어가고, 마음이 깨끗해져 부정과 사리사욕이 멀어지고, 예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니 우리 나라는 천국을 이룰 것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는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선진으로서 불쌍한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근원이 될 것이다. 이 때에 교회 세우러 가자는 표현 대신 표어로 내세운 것이 바로 우물 파러 가자!”였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서, 생수를 받아 영적으로 육적으로 축복받는 특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신약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이 우물을 파는 일을 했으니 동네마다 나라마다 지방마다 나아가서 교회를 세우고 천막을 기웠으니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님 축복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12:1-3).

 

김치선 목사는 대한신학교 학우회지인 우물 창간사에서 말하길,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우물을 파는 것이다. 신학도들은 금년으로 우물 하나씩을 팔 결심을 하여 그대로 실현하기를 바란다.”(1955. 12. 13)라고 하면서 교회개척을 강조하였다.

 

3. 김치선 목사와 박태선

 

김치선 목사에게도 간과할 수 없는 실수가 있었다. 그것은 박태선과의 관계에서였다. 정성구 박사는 김치선 박사는 1950년부터 총신교수로 9년간 봉사했다. 그리고 그는 1960년 성경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또 대한신학교 교장으로 평생 일하였다. 한때 박태선 장로와 더불어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것이 그의 생애 가운데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연세대학교 민경배 교수는 김치선 박사와 박태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태선 장로의 철저한 섹트(sect)적 사회 윤리의 감람나무, 곧 한국 예수교 전도관 부흥 협회6.25 사변 후의 교계와 일반 민중 사이에 불길처럼 확대해 갔다. 김치선 목사 창동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은 그는 19553월 하순, 남산 광장에서 김목사와 미국의 스완슨 부흥사를 초빙하여 함께 대대적인 연일 연속의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신구약의 예언된 감람나무를 차저하면서, 토착적 민간 신앙에서 흔히 쓰는 심정의 광란 상태를 일으키는 술수(박수, 발장단, 몸 흔들기, 고성방가, 통곡기도)를 팔 다리로 삼아 전란 후의 신앙 심리의 행방을 포착, 거기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남산 부흥회에서는 난데없이 썩은 뼈 타는 냄새가 나더니, 그 악취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백합화 향기가 나기 시작하고 이슬비 내리고, 기이한 광채가 그 분위기 속에 자욱했다는 이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며칠 사이에 서울 가두마다, 부흥회 천막의 들보나 밧줄에 신비한 광채가 찬란한 사지 복사판들이 나붙기 시작했다. 병자의 기적적 치료와 성신의 효험있는 임재가 부흥 군상들의 대화 속에서 놀라움으로 전달되어갔다.

 

이들은 결국 일단의 성도적 공동사회-천년성-를 형성하여, 경기도 소사, 덕소, 그리고 경남의 기장에 신앙촌을 건설하고 자급자족의 종교적 경제 공영사회를 이룩했다.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이하면서 김치선 목사는 남대문교회에 시무하게 되었고, 일본에서부터 알게되었던 박태선 집사는 남대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를 나와서 창동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을 때도 함께 행동을 했다. 박태선은 서울 창동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뭇성도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교회의 모범으로 봉사하던 박태선 집사가 창동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치선 목사는 그가 은혜를 받았다고 교만하여 탈선할까봐 걱정하여 그에게 대한신학교를 다녀서 신학공부를 해야 탈선하지 않는다고 늘 권고했다. 그래서 그는 신학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바쁜 생활에 미루어 오다 결국은 김치선 목사의 우려대로 신학의 바탕이 없이 은혜를 받아서 그만 탈선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박태선 장로가 김치선 목사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목사님! 앞으로 내가 집회하여 얻은 이익은 반드시 대한신학교를 위해 쓰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이 말에 감동받은 김치선 목사는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그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했다. 김치선 목사는 1954년 발행된 복음세계 제3실업청년과 복음운동이라는 글에서 말하길 박태선씨를 김치선 목사가 추진하고 있는 복음운동의 취지를 잘 알고있는 분으로 소개하면서, 기성교회에 불합당한 행동을 하는 자가 없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인들 가는 것을 막기만 하지 말고 교회의 지도자가 그 집회에 참석해보고 바른 비판을 하여 교인을 선히 인도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다. 19553우러 28일부터 시작된 남산고원(조선 신궁터 광장)에서 열린 집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고,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을 체험한 신자들을 자신의 모든 귀금속과 재산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헌금했다. 집회가 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박태선 장로의 생각은 김치선 목사와는 달랐다. 박태선 장로는 자신의 약속대로 집회의 헌금을 대한신학교를 세우는 데 쓰기보다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도관을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치선 목사는 대한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하여 재정이 필요하였고 이것을 충당하기 위하여 박태선과 모정의 약속을 하고 집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나 박태선이 약속을 이행하지 아니하므로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지도자로서 사람을 잘못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박태선 장로의 탈선은 급기야 한국의 목사님들이라도 자기에 와서 안수 받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성령이 없는 사람이요, 구원받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목사 자격이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기에 이르렀다. 김치선 목사도 자기를 순종하고, 따라야 참 사람이 되고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악령에 속한 사람이니까, 자기에게 와서 회개하고 생수를 마시라고 했다. 이로 인해 김치선 목사는 그와 결별을 하게 된다.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 장로와 함께 집회를 했던 것은 대한신학교를 사랑하고, 육성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동기의 협력이 결국 집회의 성공에 따른 박태선 장로의 탈선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있어 크나큰 오점으로 남고 말았다.

 

박태선 장로가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교계의 원로였던 권연호, 김치선 목사 같은 이들과 윤치영씨 등 정계 요인의 후원이 컸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다른 김치선 목사의 실수는 1950625일 새벽, 공산군이 남한을 침략함으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공산군이 삼일만에 서울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이소식을 듣고 교회를 떠나 삼각산으로 피신하였다. 얼마 후 남대문교회에서는 김치선 목사가 삼각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대표로 한상기 장로가 삼각산에 갔다

 

배명준 목사가 남대문교회의 부목사로 시무하였는데 그는 숨지 않고 서울에 있었다. 한상기 장로는 김치선 목사를 설득하여 교회로 내려 갈 것을 요구하였으나 한상기 장로는 김치선 목사에 의하여 거절당하고 삼각산을 내려갔다. 그후 삼각산에서 내려온 김치선 목사는 삼개월동안 지하에 숨어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옥오열 선교사의 도움으로 한경직 목사 가족과 김치선 목사 가족, 그리고 총회장 권연호 목사 가족이 피난을 가게 되엇다

 

박용규는 지적하기를 ‘6.25동란이 일어났을 때, 교인들보다 먼저 피난을 갔던 것이다. 그러나 교육목사로 있던 배명준 목사는 교인을 다 피난 보내고 그 후에 떠난 고로 6.25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된 후 남대문교회에 담임목사로 계속 시무하게 되었으나, 김박사는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김박사는 학자이지 목회자는 아니였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상황이 김치선 목사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를 지켜야하는 목사의 사명과 어려운 상황를 피해 피난을 가야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김치선 목사는 후자를 택함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끝난 후 동사목사이었던 배명준 목사에게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인계하고 자신은 창동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상의 사건들이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교회를 시무하면서 일어났던 중요한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삼백만 부흥운동이만 팔천동네에 우물을 파라고 하는 운동은 1940년대 후반의 한국교회상황이 복음을 증거해야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김치선 목사의 중대한 업적으로 평가 할 수 있지만, 이 운동들을 조직하고 진행하는 행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열약한면을 보여주어 나아가자는 구호는 외쳤지만 한국교회를 움직일 만한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더욱이 박태선과의 관계에 있어서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을 바로 알지 못함으로 한국교계에 엄청남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치선 목사는 그 누구보다도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였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개척했으며, 개척정신을 부르짖었다. 김치선이 한국과 일본에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였지만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어서 한국교회에 대형교회로 자리잡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에 지금까지도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절 일본선교 : 선교사로서 김치선

 

카나다 장로교회 소속인 영재영 선교사가 일본으로 파송 받게 되었을 때 김치선은 영재영 선교사와 함께 가서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일본에서 신학교육을 마쳤고 일본에 대한 체험에 있었으며, 당시 일본 안에 있었던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안양대학교 신학부 약사를 저술한 최정인 목사는 김치선 목사에 대하여 말하길 김치선은 1930223일에 일본 신호중앙신학교를 졸업했다. 김치선의 나이 31세였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위한 순회목사로 취임하였다. 그의 사역지는 쓰시마, 큐슈우, 훗가이도, 아모리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일본 관서지방의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동경 잇지신학교에서 강의도 하셨다

 

김치선 목사는 영재영 선교사의 후원으로 동경 YMCA 대강당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특히 김치선 목사는 1939년부터 1944년 까지 재일교포를 위하여 니시노마아교회, 혼요고교회, 아까시교회, 대판 동부이 와까야마교회, 모리베교회, 메구로교회, 이께부르교회등을 개척하였다.(20001020일 최정인 목사와 대담)

 

또한 신호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였고, 동경신숙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 대단한 부흥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경신숙중앙교회에 가면 조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일요일이 되면 믿지 않는 유학생들도 자기 친지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교회로 나왔다. 그래서 늦게 가면 교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 그 교회의 제직이나 성가대원들은 후일에 한국을 위해 공헌한 유명한 분들이다. 또 일반 교인들도 후일에 귀국하여 국회의원, 공직자,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교육가, 사업가, 과학자, 유명한 목사들로 활약하게 되었다. 일제시대부터 유명했던 음악가 고 이인범선생은 성가대를 지휘하였고, 와싱턴 D.C.에서 한국의 소리에서 일하시다가 작고하신 고 황제경 목사는 성가대원의 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의 조선인의 유학은 일본이었다.

 

그러므로 김치선 목사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어서 동경안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도자의 위치가 상승함에 따라 모든 행동에 세심한 주의가 요구되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일본이 한국교회에 대하여 강압정책을 펴고있었고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예배전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목회자에게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런데 1940년 김치선 목사는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중직가운데 한사람이 김치선 목사가 한국어로 설교했다고 경찰에 신고하였기 때문이었다.

 

김치선 목사에게는 약 일년간의 감옥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김치선이 수감생활을 하게 됨으로 인하여 본인뿐 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김치선 자신의 사명을 더욱더 확고히 했으며,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고 있지만 이 일이 오히려 김치선 목사 민족의식을 새롭게 고취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김치선 목사는 과거의 자신의 화려한 생활을 잊어버리고 주어진 현실에 충실함으로 오히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고, 또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잘 진행디면 현실에 따라 안주하기 쉽고, 반면에 조그만 어려움이 닥쳐 올 때에 실망하고 낙심하며 또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 쉬운데, 김치선 목사는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절대 미워하지 않았고,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향하여 불평하지도 않은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절제함으로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 전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 교포를 상대로 한 전도 및 선교활동을 의미한다. 1911년 도쿄에 있던 감리교 출신 유학생들이 따라 감리교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같은 지역에 장로교, 감리교가 따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일본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라 하여 일본에서만큼은 초교파적 연합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또한 장로교측으로서는 중국 산동지방에 현지인을 위한 선교를 계획하고 있어 일본 선교까지 단독으로 추진하기엔 벅찬 감도 있었다. 그 결과 장로교 독노회와 미감리회, 남감리회가 동의하고 재한 복음주의선교부 연합공의회에서 실무를 담당하기로 했다. 교회명칭은 재일본동경조선 예수교연합교회로 하였으며 교역자는 장로교, 감리교에서 2-3년 교대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장로교에서 주공삼 목사가 연합교회 초대목사로 파송되었고 1-3년 주기로 장로교, 감리교에서 교대로 파송했는데 김치선 목사는 1935년부터 1944년까지 목회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 교단 소속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치선 목사의 열정을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를 이끌고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 한다. 그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면 힘으로는 할 수 없다. 뜨거운 가슴의 열기만이 보이지 않는 신앙 세계를 이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의 아성을 쌓아 놓고 자기 위주로 교단을 이끌어 가기도 하고 목회를 하기도 한다. 때문에 오늘 한국의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의 전체 공동체보다 개교회주의로 흘러가 그곳에서 안주하려고만 한다. 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김치선 목사는 어느 곳에 가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여러번 사역지를 옮겼지만, 심지어 감옥에 들어가는 어려운 상황을 만났지만 굴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사명인 영혼구원을 위하여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하였음을 볼 수 있다

 

김치선 목사야 말고 대신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 있기 전에 최초의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달. 김동화는 말하길 구슈와 시모노세기에서 북쪽 훗가이도까지, 조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복음 전했다. 가는 곳마다 믿는 자가 생기고 그 곳에 교회를 세웠다. 처음에는 가정집에서 예배를 보았으나, 그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날마다 믿는 자가 더해 갔다.’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김치선 박사의 남대문교회에서의 목회활동을 통하여 열정적인 목회자의 모습을 보았고, 일본에서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헌신적인 선교사로서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후대에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겸손한 자세로 대하면서도 자신의 신앙과 신학에는 추호도 양보가 없었던 그 확고부동한 신념과 강인한 성품은 한국교계를 대표하는 목회자중의 한사람으로, 또한 선교사중의 한사람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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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고봉 김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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