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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의 명암
칭다오에 거주할 때 후배 2명이 대안학교에 근무를 하게된 동기로 한국의 대안학교라는 교육기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가 2천년대 중반이었음에도 중고등과정 학생들의 부담금은 매월 1백만원대 였다는 점에 깜짝 놀랄 수 밖에. 당시 한국의 고등학교 3개월 수업료가 30만원대 였고 우리 아이가 재학하던 기숙형 특자 고교의 1기분 수업료가 90만원 미만이었던 사실과 비교해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비싼 수업료가 산출되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듣고보니 충분히 납득이 가능했다. 당시 중국에도 재중한인 자녀를 위한 한국국제학교가 여러지역에 있었는데, 연변한국국제학교만이 한국과 동일한 수업료를 징수했고 나머지 한국학교들은 수익자 부담 원칙을 바탕으로 한국과 비교할 때 사립학교 수준의 수업료를 부담해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일하게 연변한국학교만이 한국의 NGO가 설립한 덕분에 당시 연변과기대 소속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한 덕분에 한국과 동일한 수업료로 운영이 가능했지만 나머지 교육부인가 한국학교들은 교과서이외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전액 수익자가 부담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대안학교는 그마저도 지원을 받지 못한다. 정부에서 교과서를 지원하고 싶어도 중국정부가 "외국교과서 통관불허"의 원칙을 고집해 반입이 안되기 때문이었는데, 현재는 영사관을 통한 반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국의 정부인가 초중고교들은 지자체에서 교사의 보수를 지급해준다. 하지만 해외의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는 그 어디로 부터도 재정지원을 받지 못한다. 대안학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내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대안학교는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한다. 대안학교의 목적은 두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기존 공교육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특별한 목적의 교육을 위해서일 것이다. 한국에는 특목고로 표기하는 특수목적고등학교가 있지만 대다수 특목고는 "고급 입시전문학교"로 분류가 된다. 특목고는 아무나 입학하지 못하지만 특수목적의 대안학교는 재정부담의 능력만 된다면 아무나 입학이 가능하다. 10여년전 부터 기독교계 특히 대형교회를 중심으로한 특수목적 지향의 대안학교들이 많이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도권의 교육이 편향된 경우가 많으니 나름 의미있는 투자가 될 것이다. 특히 현정부와 같은 좌편향 시대의 공교육은 심각하기 그지없다. 자신들의 정체성만을 세뇌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요즘 대안학교가 한국사회의 화두로 등장하고 연일 메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좋은 의미가 아닌, 매우 부정적인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 생각하기에는 "비대면 정책이면 그 정책에 따라 휴교할 것이지!"라고 일단 그들을 탓하고 본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휴교하지 못하고 계속 기숙형 학교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속사정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학교를 운영하기 위한 재정은 몫돈이다 보니 매월 납부가 대다수 현실인데, 학교가 휴교상태에서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교육비를 받기가 힘들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암암리에 교육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속사정이 있다. 아무튼 정부로서는 그들이 왜 대안학교를 운영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들은 "비인가학교"라는 점만을 부각하려 한다. 즉, 정부의 지시를 거부하는 무법천지의 집단이라는 점을 은연중 세뇌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인들 역시 "기독교집단이 이 사회의 문제집단"이라고 공격하려 든다. 정부로서는 자신들의 방역실패에 대한 분풀이 대상으로 역이용하는 셈이다. 정부가 "좀 더"대안교육이 필요한 세대들을 위해 투자한다면 기독교단체들의 대안교육 기관은 굳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기독교기관이 설립한 교육기관에 대해 "설립목적을 위한 최소한의 교육시간 배려"만 해준다하여도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대안학교들은 만들어지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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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자살
현재 서울에는 죽은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가 있다.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는 목사도 목회가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이미 죽은지가 8년도 넘는 목사가 목회를한다니 놀라운 일이다. 과학의 발달로 그가 생시에 녹화해둔 영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목사의 죽음에 대해 안다면 기절할 일이다. 평소에 "가고싶은 하늘나라"를 노래하던 목사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의 목을 맸기 때문이다. 의사는 우울증 때문이라 진단하였다. 최근의 코로나 시국은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만 특히 타격이 큰 업종이 관광업과 요식업 등등의 대면활동이 반듯이 필요한 업종들이다. 그중에는 교회도 포함이 된다. 그래도 기반이 잡힌 교회는 비대면 상황이라 할지라도 십일조를 비롯한 자신의 의무를 감당할테니 그나마 형편은 좋을 것이고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 입장에서는 "한가한 여가"를 즐기는 일종의 안식년 기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척교회를 비롯한 미자립 교회로서는 이보다 더한 타격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개척교회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합법적으로 주일예배를 비롯한 대면예배를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니 꾀돌이 신자들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주일헌금을 비롯한 각종 헌금도 안해도 된다. 헌금을 안 한다고 어떤 형벌이 내려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몇 안되는 교인들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목사에게는 청천벽력이다. 임대료와 생활비를 조달할 길이 막연하다. 내 주변의 분들은 내가 신학교를 간다고 할 때 두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주로 친가와 주변의 분들은 "굳이 너까지?" 하는 반응이었고, 외가쪽 친지들의 반응은 "오 놀라운 결단이구나!"였다. 친가 쪽에는 이미 목회자들이 여러명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외가쪽에는 목회자가 없다. 나의 외 증조부는 강화군 화도면 내리감리교회의 영수였는데, 별명이 "성신할아버지"였다고 하셨다. 아마도 성령충만 하셨기 때문이고 평신도 강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신 분이시지만 아쉽게도 자손중에 목회자는 없다. 오랫 만에 외손 중에 목회자가 나왔으니 신학교 진학을 굳이 반대할 이유도 비방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반드시 신학교를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20대 초 고난의 시기에 돈을 벌기위해 원양어선 선원 생활을 할 때 폭풍우 속에 바다에 추락해 한시간 이상을 물속에서 사투를 벌일 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래도 신학교 재학 기간에는 저축해 놓은 돈으로 염려 없이 지냈지만 졸업 후 교회를 개척한 이후 부터는 말로 다 못할,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동생이 결혼식을 하는데 입고갈 양복이 변변치 못해 청년 시절 입던 10년도 넘은 양복은 얼마나 입었던지 옷깃이 헤어진 상태였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입고가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 임대한 건물은 월세였지만 임대주는 계속 전세로 돌려 달라는데, 전세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10개월 만에 쫒겨나고 말았다. 아쉬운대로 사택에서 몇 주간 예배를 드리던 중 반가운 제안이 들어와 경노당 부속건물을 보증금 없이 저렴한 월세만으로 임대해 염려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개척은 어렵다. 너무나 어렵다 보니 목회자는 때로는 탈법을 서슴없이 행하기도 한다. 생존의 몸부림이다. 목회자가 소속된 상급 단체나 선배들은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원칙만을 강조할 뿐이다. 자신들도 그렇게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어느 개척 교회 사모가 자살을했다는 충격적인 소문을 접하며 "어찌 이럴수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여 년의 목회를 하던 중 우연히 방문한 중국에서 20대 초 태풍 부는 밤바다에서 사경을 헤맬 때 하나님과의 약속이 떠올라 결국 목회를 사임하고 선교사로 떠나게 된 동기이다. 애당초 하나님과의 약속으로 찾아간 선교이니 후원금에는 관심이 없었다. 생활비만큼은 스스로 해결하는 원칙이었다. 그래도 지인들을 통해 월10만원씩 지원되는 후원금은 모두 선교비로 쓰여 졌다. 소유하던 아파트 매각대금은 자녀 교육비와 전세금을 제외하고 10여 년간 걱정 없이 지내게 해주었다. 이미 나이 먹어 시작한 선교사역 이다보니 언어 습득에 한계가 있었고 사역 역시 정보통신을 이용한 사역 이다보니 자연히 사역자들을 비롯한 현지 교민들을 위한 컴퓨터 교육과 정비를 통해 약간의 선교비를 조달을 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발전하면서 더 이상 컴퓨터는 필요 없는 오로지 사무용으로만 밀려나면서 자연히 부업도 사라지고 말았다. 집을 팔아 저축했던 재정이 바닥나고 그렇다고 부업으로 소득을 올릴 상황이 안되다보니 심지어는 주택 임대료 조차도 조달할 길이 없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귀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것 저것 따질 여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35년을 남 밑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의 바닥 생활이란 더이상 말할 수 없는 "광야로 쫒겨나 목동이 된 모세"이다. 비로서 왕자에서 하루 아침에 목동이 된 모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목사는 벼슬이 아니다. 돈이 없으면 대리운전도 하고 공공근로도 해야 한다. 왜 자살을 생각해야 하는가? 자신을 너무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47년전 죽었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에 내가 감당 할수 만 있다면 그 어떤 노동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나 살자고 누군가에게 부담을 준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못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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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설교 100배로 잘 듣기
교회가 되려면 두가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설교자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설교를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가 있어야 한다. 교회로서 최악의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설교자, 설교자의 말은 사람의 말로 듣는 청중이 있는 교회이다. 예수님이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 9)고 말씀하시고, 이 말씀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각 말미에서 반복하신 것(2-3장)은, 자기 백성들이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을 기대하신다. 말씀을 들으므로 "복있도다"라고 확신시켜 주신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라"(눅10:16).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반대로 그분의 말씀 전하는 설교자를 배척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짓이다. "전파하는 자가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왜 설교를 듣는 일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써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듣지 않는다거나 그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불경건이다. 인류를 죄와 비참에 떨어지게 한 것도 말씀을 구체적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대신 사탄의 말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니면 사탄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과가 결정된다. 회개와 믿음 그리고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신다. 에덴 동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아니었다. 듣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절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생각을 좇아 자기 길을 걸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든지 완악하게 하든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모든 사람은 말씀이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해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주목하게 하고자 하실 때 "이스라엘아 들으라"(신5:1; 6:4; 9:1)고 외치셨다. 죄인들은 듣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설교자들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해리 아이언사이드(Harry Ironside)가 자기는 설교하는 은사를 받았지만 회중들은 듣는 은사를 받지 못한 것 같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설교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만큼 중요하다면, 설교를 가볍게 생각하고 경멸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신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기를 배우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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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대로 행복 하라 1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 순간도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국회의원? 회의장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행복한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를 리는 없으니까? 대통령?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대통령은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장면은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도 모든 순간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세상의 꼭대기에 오른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참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는 언제나 행복이 가득할까? 많은 사람들이 소박한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기 위해 평범한 삶을 조명하고 일상 속의 행복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상 속에 행복이 있고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일상 속에는 슬픔과 불행도 함께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한 순간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항상 행복한 사람이란 없다. 어떠한 위치에 있든 사람은 행복과 불행 사이를 왕래하는 존재이다. 행복했다가 슬퍼지고 슬프다가 행복해진다. 사람은 왜 이렇게 행복과 불행 사이를 방황하는 것일까? 외적인 조건은 변한 것이 없는데 왜 어느 날은 행복하고 어떤 날은 불행 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와 상황을 거부할 때는 불행하게 된다. 행복은 사람이 처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그 위치를 즐겁게 생각하지 못하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전직 대통령 중에“대통령 못 해먹겠다!”라고 말한 분이 있다. 그 분의 일상은 언론에 보도되는 것만으로도 대통령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괴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만큼 성공한 후에도 슬프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사람은 어떤 자리에 오를지라도 자신의 위치를 즐기지 못하면 불행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위치, 신분과 역할을 최대한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을 찾아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10년만 젊으면 더 바랄 게 없겠어!>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가끔씩 듣는 말이다. 사람들은 젊을 때가 좋았다고 한다. “내가 몇 년 만 젊었어도!” 하며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한다. 이런 사람들이 10년 젊어진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10년이 아니라 20년이 젊어진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나이든 사람은 불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늙은 사람은 불행한가?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행복에 대한 개념은 차이가 없다. 젊어서 행복한 것도 늙어서 불행 한 것도 아니다. 젊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젊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늙어서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국한 된 특권이 아니다. 삶의 모든 시기에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다. 다만 자신의 현재를 인생의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즉 행복은 가치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50대 끝을 삶을 살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젊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침착해진 지금이 좋고, 철없을 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인생에 대한 깨우침, 청년 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세상을 보는 시각, 사람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생각을 여유 만만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금이 나는 정말 좋다. 그런 이유로 나는 철없고 소심 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싫다. 도리어 지금 이 상태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지금의 내가 너무 마음에 들고 나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행복 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최고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다. 오늘의 내 모습이 가장 멋진 모습이다. 지나간 날의 추억에 빠지지 말라. 그러면 오늘이 불행하게 된다. 오늘을 버리고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미래에 매달리지도 말라.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내일도 불행할 확률이 높다. 행복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다. 오늘이 행복이다. 지금 나의 모습 이대로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모습이다. <글/김홍식> -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외 14권 출판. - 부부행복학교 대표. www.booboohappy.co.kr. - 시온LED 대표. http://m.onejin.kr. -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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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의 명암
- 칭다오에 거주할 때 후배 2명이 대안학교에 근무를 하게된 동기로 한국의 대안학교라는 교육기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가 2천년대 중반이었음에도 중고등과정 학생들의 부담금은 매월 1백만원대 였다는 점에 깜짝 놀랄 수 밖에. 당시 한국의 고등학교 3개월 수업료가 30만원대 였고 우리 아이가 재학하던 기숙형 특자 고교의 1기분 수업료가 90만원 미만이었던 사실과 비교해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비싼 수업료가 산출되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듣고보니 충분히 납득이 가능했다. 당시 중국에도 재중한인 자녀를 위한 한국국제학교가 여러지역에 있었는데, 연변한국국제학교만이 한국과 동일한 수업료를 징수했고 나머지 한국학교들은 수익자 부담 원칙을 바탕으로 한국과 비교할 때 사립학교 수준의 수업료를 부담해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일하게 연변한국학교만이 한국의 NGO가 설립한 덕분에 당시 연변과기대 소속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한 덕분에 한국과 동일한 수업료로 운영이 가능했지만 나머지 교육부인가 한국학교들은 교과서이외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전액 수익자가 부담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대안학교는 그마저도 지원을 받지 못한다. 정부에서 교과서를 지원하고 싶어도 중국정부가 "외국교과서 통관불허"의 원칙을 고집해 반입이 안되기 때문이었는데, 현재는 영사관을 통한 반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국의 정부인가 초중고교들은 지자체에서 교사의 보수를 지급해준다. 하지만 해외의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는 그 어디로 부터도 재정지원을 받지 못한다. 대안학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내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대안학교는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한다. 대안학교의 목적은 두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기존 공교육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특별한 목적의 교육을 위해서일 것이다. 한국에는 특목고로 표기하는 특수목적고등학교가 있지만 대다수 특목고는 "고급 입시전문학교"로 분류가 된다. 특목고는 아무나 입학하지 못하지만 특수목적의 대안학교는 재정부담의 능력만 된다면 아무나 입학이 가능하다. 10여년전 부터 기독교계 특히 대형교회를 중심으로한 특수목적 지향의 대안학교들이 많이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도권의 교육이 편향된 경우가 많으니 나름 의미있는 투자가 될 것이다. 특히 현정부와 같은 좌편향 시대의 공교육은 심각하기 그지없다. 자신들의 정체성만을 세뇌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요즘 대안학교가 한국사회의 화두로 등장하고 연일 메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좋은 의미가 아닌, 매우 부정적인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 생각하기에는 "비대면 정책이면 그 정책에 따라 휴교할 것이지!"라고 일단 그들을 탓하고 본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휴교하지 못하고 계속 기숙형 학교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속사정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학교를 운영하기 위한 재정은 몫돈이다 보니 매월 납부가 대다수 현실인데, 학교가 휴교상태에서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교육비를 받기가 힘들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암암리에 교육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속사정이 있다. 아무튼 정부로서는 그들이 왜 대안학교를 운영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들은 "비인가학교"라는 점만을 부각하려 한다. 즉, 정부의 지시를 거부하는 무법천지의 집단이라는 점을 은연중 세뇌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인들 역시 "기독교집단이 이 사회의 문제집단"이라고 공격하려 든다. 정부로서는 자신들의 방역실패에 대한 분풀이 대상으로 역이용하는 셈이다. 정부가 "좀 더"대안교육이 필요한 세대들을 위해 투자한다면 기독교단체들의 대안교육 기관은 굳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기독교기관이 설립한 교육기관에 대해 "설립목적을 위한 최소한의 교육시간 배려"만 해준다하여도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대안학교들은 만들어지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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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자살
- 현재 서울에는 죽은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가 있다. 팔팔하게 살아 움직이는 목사도 목회가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이미 죽은지가 8년도 넘는 목사가 목회를한다니 놀라운 일이다. 과학의 발달로 그가 생시에 녹화해둔 영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목사의 죽음에 대해 안다면 기절할 일이다. 평소에 "가고싶은 하늘나라"를 노래하던 목사가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의 목을 맸기 때문이다. 의사는 우울증 때문이라 진단하였다. 최근의 코로나 시국은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만 특히 타격이 큰 업종이 관광업과 요식업 등등의 대면활동이 반듯이 필요한 업종들이다. 그중에는 교회도 포함이 된다. 그래도 기반이 잡힌 교회는 비대면 상황이라 할지라도 십일조를 비롯한 자신의 의무를 감당할테니 그나마 형편은 좋을 것이고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 입장에서는 "한가한 여가"를 즐기는 일종의 안식년 기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척교회를 비롯한 미자립 교회로서는 이보다 더한 타격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개척교회를 기피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합법적으로 주일예배를 비롯한 대면예배를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니 꾀돌이 신자들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주일헌금을 비롯한 각종 헌금도 안해도 된다. 헌금을 안 한다고 어떤 형벌이 내려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몇 안되는 교인들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목사에게는 청천벽력이다. 임대료와 생활비를 조달할 길이 막연하다. 내 주변의 분들은 내가 신학교를 간다고 할 때 두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주로 친가와 주변의 분들은 "굳이 너까지?" 하는 반응이었고, 외가쪽 친지들의 반응은 "오 놀라운 결단이구나!"였다. 친가 쪽에는 이미 목회자들이 여러명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외가쪽에는 목회자가 없다. 나의 외 증조부는 강화군 화도면 내리감리교회의 영수였는데, 별명이 "성신할아버지"였다고 하셨다. 아마도 성령충만 하셨기 때문이고 평신도 강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신 분이시지만 아쉽게도 자손중에 목회자는 없다. 오랫 만에 외손 중에 목회자가 나왔으니 신학교 진학을 굳이 반대할 이유도 비방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반드시 신학교를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20대 초 고난의 시기에 돈을 벌기위해 원양어선 선원 생활을 할 때 폭풍우 속에 바다에 추락해 한시간 이상을 물속에서 사투를 벌일 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래도 신학교 재학 기간에는 저축해 놓은 돈으로 염려 없이 지냈지만 졸업 후 교회를 개척한 이후 부터는 말로 다 못할,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동생이 결혼식을 하는데 입고갈 양복이 변변치 못해 청년 시절 입던 10년도 넘은 양복은 얼마나 입었던지 옷깃이 헤어진 상태였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입고가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 임대한 건물은 월세였지만 임대주는 계속 전세로 돌려 달라는데, 전세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10개월 만에 쫒겨나고 말았다. 아쉬운대로 사택에서 몇 주간 예배를 드리던 중 반가운 제안이 들어와 경노당 부속건물을 보증금 없이 저렴한 월세만으로 임대해 염려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개척은 어렵다. 너무나 어렵다 보니 목회자는 때로는 탈법을 서슴없이 행하기도 한다. 생존의 몸부림이다. 목회자가 소속된 상급 단체나 선배들은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원칙만을 강조할 뿐이다. 자신들도 그렇게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어느 개척 교회 사모가 자살을했다는 충격적인 소문을 접하며 "어찌 이럴수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여 년의 목회를 하던 중 우연히 방문한 중국에서 20대 초 태풍 부는 밤바다에서 사경을 헤맬 때 하나님과의 약속이 떠올라 결국 목회를 사임하고 선교사로 떠나게 된 동기이다. 애당초 하나님과의 약속으로 찾아간 선교이니 후원금에는 관심이 없었다. 생활비만큼은 스스로 해결하는 원칙이었다. 그래도 지인들을 통해 월10만원씩 지원되는 후원금은 모두 선교비로 쓰여 졌다. 소유하던 아파트 매각대금은 자녀 교육비와 전세금을 제외하고 10여 년간 걱정 없이 지내게 해주었다. 이미 나이 먹어 시작한 선교사역 이다보니 언어 습득에 한계가 있었고 사역 역시 정보통신을 이용한 사역 이다보니 자연히 사역자들을 비롯한 현지 교민들을 위한 컴퓨터 교육과 정비를 통해 약간의 선교비를 조달을 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발전하면서 더 이상 컴퓨터는 필요 없는 오로지 사무용으로만 밀려나면서 자연히 부업도 사라지고 말았다. 집을 팔아 저축했던 재정이 바닥나고 그렇다고 부업으로 소득을 올릴 상황이 안되다보니 심지어는 주택 임대료 조차도 조달할 길이 없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귀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것 저것 따질 여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35년을 남 밑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의 바닥 생활이란 더이상 말할 수 없는 "광야로 쫒겨나 목동이 된 모세"이다. 비로서 왕자에서 하루 아침에 목동이 된 모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목사는 벼슬이 아니다. 돈이 없으면 대리운전도 하고 공공근로도 해야 한다. 왜 자살을 생각해야 하는가? 자신을 너무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47년전 죽었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에 내가 감당 할수 만 있다면 그 어떤 노동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나 살자고 누군가에게 부담을 준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못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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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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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대로 행복 하라(2)
- 1억을 간절히 바라던 사람에게 정말 1억이 생기면 정말 그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게 될까? 소망하던 1억을 갖게 된 사람은 그 후로 항상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일이 이루어진다고 현실이 꿈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꿈은 이루어져도 현실은 여전히 현실이다. 사람이 기대하는 꿈은 아무런 부작용과 변칙적인 상황 없는 희망이지만, 꿈을 이룬 현실은 희망에 포함 되지 않은 변수와 부작용으로 가득 차있다. 1억을 바라던 사람이 1억을 얻은 후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결코 1억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액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1억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1억을 가진 후에 10억을 바랄 것이고, 10억을 가진 후엔 100억을 바랄 것이다. 사람을 행복 하게 하는 것은 1억도, 100억도 아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단 돈 만원 이라면 그 만원으로 행복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다.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보다 중학교를 나온 사람이, 중학교를 나온 사람보다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대학을 졸업한 사람보다 대학원을 나온 사람이 더 행복할까? 지금 우리 사회는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있는 듯하다. 자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반듯이 명문대학에 들여보내야 한다는 부모, 판사나 검사, 의사나 교수 정도는 돼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행복은 많이 배운 사람들의 전유물일까?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만 행복할 특권을 가지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그런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철학가나 농부나 타고난 가치는 동일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가치는 세상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의 가치이다. 경찰이나 도둑이나, 판사나 죄인이나, 박사나 바보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살면서 아주 조금 더 가치를 추가하게 된다. 세상에서 얻는 후천적 가치는 타고난 생명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은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갈 때는 살면서 얻은 모든 가치를 남겨두고 떠나게 된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동일하게 가지고 태어난다.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 할 수 있고, 불행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불행하게 된다. 진정한 행복은 후천적 습득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누구처럼 돼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잘나고 똑똑해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행복 할 수 없다. 오늘 지금 그대로 행복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도 행복 할 수 없다. 무더위를 피해 휴가를 떠난 가족이 달콤한 일주일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돌아가는 길이 막힐지도 모르기에 아버지는 새벽에 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전날 저녁에 미리 짐을 챙겨서 가방에 넣었고, 새벽에 잠이 깨면 대충 아침을 때운 후에 바로 출발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해두었다. 다음 날 일찍 깬 아버지는 길이 막히기 전에 빨리 출발해야 한다고 곤히 잠든 아이들을 흔들어 깨웠다. 눈을 비비고 일어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운전 하는 동안 차에서 더 잘 수 있으니 빨리 일어나서 소지품을 챙기라고 하였다. 아빠가 전날 정리한 짐을 차에 싣고 있는 동안 끝나가는 휴가가 아쉬운 지 아이들은 호숫가로 달려 나갔다. 짐을 다 옮기고 간단한 아침을 먹기 위해 엄마는 주방으로 들어가고 아빠는 아이들을 부르기 위해 호숫가로 나갔다. 풀잎에는 보석처럼 이슬이 맺혀있고 백사장의 모래는 아침햇살을 받아 유리알처럼 반짝였으며 호수는 물안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아이들은 천사처럼 반짝이는 백사장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난 아빠의 눈에 휴가 내내 발견하지 못했던 호숫가의 아름다운 정경이 들어왔다. 그렇지만 이미 휴가는 끝난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해야 피곤하지 않은 일상생활의 리듬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호숫가를 그림처럼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향해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를 치려는 순간 아빠의 가슴 속에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저렇게 행복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을 지금 불러들여야만 하나?” / “인생의 행복은 바로 이런 순간인데 막히지 않는 길을 가기 위해 당장 떠나야만 하나?” / “행복의 한 가운데 빠져 있는 아이들을 냉정한 현실로 끌어 올려야만 하나?” / “새벽에 떠나야 한다고 누가 결정한 것인가?” / “정말 새벽에 떠나야만 하나?” / “지금 이 순간이 아이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데.” 호숫가를 달리며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빠를 향해 아이들이 어서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빠는 아침을 먹으러 들어오라고 부르는 대신 아이들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어린 천사들 사이에서 함께 뛰는 어른 천사가 되었다. 물가를 한참 뛰고 있는 사이 아침 준비를 마친 엄마가 아이들과 아빠를 부르기 위해 호숫가로 나왔다. 엄마를 발견한 아빠는 달려와서 아침은 천천히 먹고 호숫가에서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하자고 하였고, 온 가족은 아침을 식탁위에 차려놓은 채 호숫가에서 휴가의 마지막을 장식 하였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 온 가족들은 그 후로 오랫동안 아니, 평생 동안 호숫가의 행복한 장면을 이야기하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오늘 내가 있는 곳에서, 지금 이대로 행복할 수 있다면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도 행복 할 수 있을 것이다. 머물고 싶은 자리에서 무언가를 위해 일어서야 하는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지금 떠나야만 하는가?” <김홍식 목사> -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외 14권 출판. - 부부행복학교 대표. www.booboohappy.co.kr. - 시온LED 대표. http://m.onejin.kr. -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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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대로 행복 하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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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금 그대로 행복 하라(1)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 순간도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국회의원? 회의장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행복한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를 리는 없으니까? 대통령?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대통령은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장면은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도 모든 순간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세상의 꼭대기에 오른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참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는 언제나 행복이 가득할까? 많은 사람들이 소박한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기 위해 평범한 삶을 조명하고 일상 속의 행복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상 속에 행복이 있고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일상 속에는 슬픔과 불행도 함께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한 순간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항상 행복한 사람이란 없다. 어떠한 위치에 있든 사람은 행복과 불행 사이를 왕래하는 존재이다. 행복했다가 슬퍼지고 슬프다가 행복해진다. 사람은 왜 이렇게 행복과 불행 사이를 방황하는 것일까? 외적인 조건은 변한 것이 없는데 왜 어느 날은 행복하고 어떤 날은 불행 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와 상황을 거부할 때는 불행하게 된다. 행복은 사람이 처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그 위치를 즐겁게 생각하지 못하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전직 대통령 중에“대통령 못 해먹겠다!”라고 말한 분이 있다. 그 분의 일상은 언론에 보도되는 것만으로도 대통령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괴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만큼 성공한 후에도 슬프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사람은 어떤 자리에 오를지라도 자신의 위치를 즐기지 못하면 불행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위치, 신분과 역할을 최대한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을 찾아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10년만 젊으면 더 바랄 게 없겠어!>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가끔씩 듣는 말이다. 사람들은 젊을 때가 좋았다고 한다. “내가 몇 년 만 젊었어도!” 하며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한다. 이런 사람들이 10년 젊어진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10년이 아니라 20년이 젊어진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나이든 사람은 불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늙은 사람은 불행한가?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행복에 대한 개념은 차이가 없다. 젊어서 행복한 것도 늙어서 불행 한 것도 아니다. 젊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젊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늙어서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국한 된 특권이 아니다. 삶의 모든 시기에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다. 다만 자신의 현재를 인생의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즉 행복은 가치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50대 끝을 삶을 살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젊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침착해진 지금이 좋고, 철없을 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인생에 대한 깨우침, 청년 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세상을 보는 시각, 사람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생각을 여유 만만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금이 나는 정말 좋다. 그런 이유로 나는 철없고 소심 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싫다. 도리어 지금 이 상태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지금의 내가 너무 마음에 들고 나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행복 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최고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다. 오늘의 내 모습이 가장 멋진 모습이다. 지나간 날의 추억에 빠지지 말라. 그러면 오늘이 불행하게 된다. 오늘을 버리고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미래에 매달리지도 말라.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내일도 불행할 확률이 높다. 행복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다. 오늘이 행복이다. 지금 나의 모습 이대로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모습이다. 김홍식 목사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외 14권 출판. 부부행복학교 대표. www.booboohappy.co.kr. 시온LED 대표. http://m.onejin.kr.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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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금 그대로 행복 하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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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설교 100배로 잘 듣기
- 교회가 되려면 두가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설교자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설교를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가 있어야 한다. 교회로서 최악의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설교자, 설교자의 말은 사람의 말로 듣는 청중이 있는 교회이다. 예수님이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 : 9)고 말씀하시고, 이 말씀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각 말미에서 반복하신 것(2-3장)은, 자기 백성들이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을 기대하신다. 말씀을 들으므로 "복있도다"라고 확신시켜 주신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라"(눅10:16).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반대로 그분의 말씀 전하는 설교자를 배척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짓이다. "전파하는 자가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왜 설교를 듣는 일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써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듣지 않는다거나 그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불경건이다. 인류를 죄와 비참에 떨어지게 한 것도 말씀을 구체적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대신 사탄의 말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니면 사탄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과가 결정된다. 회개와 믿음 그리고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신다. 에덴 동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아니었다. 듣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절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생각을 좇아 자기 길을 걸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든지 완악하게 하든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모든 사람은 말씀이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해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주목하게 하고자 하실 때 "이스라엘아 들으라"(신5:1; 6:4; 9:1)고 외치셨다. 죄인들은 듣지 않으려 한다. 그 대신 설교자들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해리 아이언사이드(Harry Ironside)가 자기는 설교하는 은사를 받았지만 회중들은 듣는 은사를 받지 못한 것 같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설교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만큼 중요하다면, 설교를 가볍게 생각하고 경멸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신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듣기를 배우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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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설교 100배로 잘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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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대로 행복 하라 1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 순간도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국회의원? 회의장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행복한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를 리는 없으니까? 대통령?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대통령은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장면은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도 모든 순간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세상의 꼭대기에 오른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참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는 언제나 행복이 가득할까? 많은 사람들이 소박한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기 위해 평범한 삶을 조명하고 일상 속의 행복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상 속에 행복이 있고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일상 속에는 슬픔과 불행도 함께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한 순간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항상 행복한 사람이란 없다. 어떠한 위치에 있든 사람은 행복과 불행 사이를 왕래하는 존재이다. 행복했다가 슬퍼지고 슬프다가 행복해진다. 사람은 왜 이렇게 행복과 불행 사이를 방황하는 것일까? 외적인 조건은 변한 것이 없는데 왜 어느 날은 행복하고 어떤 날은 불행 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와 상황을 거부할 때는 불행하게 된다. 행복은 사람이 처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그 위치를 즐겁게 생각하지 못하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전직 대통령 중에“대통령 못 해먹겠다!”라고 말한 분이 있다. 그 분의 일상은 언론에 보도되는 것만으로도 대통령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괴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만큼 성공한 후에도 슬프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사람은 어떤 자리에 오를지라도 자신의 위치를 즐기지 못하면 불행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위치, 신분과 역할을 최대한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을 찾아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10년만 젊으면 더 바랄 게 없겠어!>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가끔씩 듣는 말이다. 사람들은 젊을 때가 좋았다고 한다. “내가 몇 년 만 젊었어도!” 하며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한다. 이런 사람들이 10년 젊어진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10년이 아니라 20년이 젊어진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나이든 사람은 불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늙은 사람은 불행한가?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행복에 대한 개념은 차이가 없다. 젊어서 행복한 것도 늙어서 불행 한 것도 아니다. 젊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젊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늙어서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국한 된 특권이 아니다. 삶의 모든 시기에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다. 다만 자신의 현재를 인생의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즉 행복은 가치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50대 끝을 삶을 살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젊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침착해진 지금이 좋고, 철없을 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인생에 대한 깨우침, 청년 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세상을 보는 시각, 사람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생각을 여유 만만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금이 나는 정말 좋다. 그런 이유로 나는 철없고 소심 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싫다. 도리어 지금 이 상태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지금의 내가 너무 마음에 들고 나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행복 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최고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다. 오늘의 내 모습이 가장 멋진 모습이다. 지나간 날의 추억에 빠지지 말라. 그러면 오늘이 불행하게 된다. 오늘을 버리고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미래에 매달리지도 말라.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내일도 불행할 확률이 높다. 행복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다. 오늘이 행복이다. 지금 나의 모습 이대로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모습이다. <글/김홍식> -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외 14권 출판. - 부부행복학교 대표. www.booboohappy.co.kr. - 시온LED 대표. http://m.onejin.kr. -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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