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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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지금 그대로 행복 하라(1)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 순간도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국회의원? 회의장에서 주먹다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행복한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를 리는 없으니까? 대통령?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대통령은 모든 순간을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장면은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통령도 모든 순간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세상의 꼭대기에 오른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참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는 언제나 행복이 가득할까? 많은 사람들이 소박한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기 위해 평범한 삶을 조명하고 일상 속의 행복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상 속에 행복이 있고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일상 속에는 슬픔과 불행도 함께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한 순간도 불행하지 않은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항상 행복한 사람이란 없다. 어떠한 위치에 있든 사람은 행복과 불행 사이를 왕래하는 존재이다. 행복했다가 슬퍼지고 슬프다가 행복해진다. 사람은 왜 이렇게 행복과 불행 사이를 방황하는 것일까? 외적인 조건은 변한 것이 없는데 왜 어느 날은 행복하고 어떤 날은 불행 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람이 행복을 느낄 때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와 상황을 거부할 때는 불행하게 된다. 행복은 사람이 처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그 위치를 즐겁게 생각하지 못하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전직 대통령 중에“대통령 못 해먹겠다!”라고 말한 분이 있다. 그 분의 일상은 언론에 보도되는 것만으로도 대통령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괴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만큼 성공한 후에도 슬프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사람은 어떤 자리에 오를지라도 자신의 위치를 즐기지 못하면 불행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위치, 신분과 역할을 최대한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을 찾아내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10년만 젊으면 더 바랄 게 없겠어!>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가끔씩 듣는 말이다. 사람들은 젊을 때가 좋았다고 한다. “내가 몇 년 만 젊었어도!” 하며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탄식한다. 이런 사람들이 10년 젊어진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10년이 아니라 20년이 젊어진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나이든 사람은 불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젊은 사람은 행복하고 늙은 사람은 불행한가?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행복에 대한 개념은 차이가 없다. 젊어서 행복한 것도 늙어서 불행 한 것도 아니다. 젊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젊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 한 사람은 늙어서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국한 된 특권이 아니다. 삶의 모든 시기에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다. 다만 자신의 현재를 인생의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즉 행복은 가치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50대 끝을 삶을 살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젊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침착해진 지금이 좋고, 철없을 때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인생에 대한 깨우침, 청년 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세상을 보는 시각, 사람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생각을 여유 만만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금이 나는 정말 좋다. 그런 이유로 나는 철없고 소심 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싫다. 도리어 지금 이 상태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지금의 내가 너무 마음에 들고 나의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행복 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최고 황금기는 바로 지금이다. 오늘의 내 모습이 가장 멋진 모습이다. 지나간 날의 추억에 빠지지 말라. 그러면 오늘이 불행하게 된다. 오늘을 버리고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미래에 매달리지도 말라. 오늘이 불행한 사람은 내일도 불행할 확률이 높다. 행복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다. 오늘이 행복이다. 지금 나의 모습 이대로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모습이다. 김홍식 목사 베스트셀러 작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외 14권 출판. 부부행복학교 대표. www.booboohappy.co.kr. 시온LED 대표. http://m.onejin.kr. 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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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칼럼
    2021-05-25
  • [연재] “효가 살아야 나라가 잘되고 가정이 행복해진다.”
    “효가 살아야 나라가 잘되고 가정이 행복해진다.” 성경은 기독교 효의 근본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내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 하리라(엡6장1절-3절) 이조시대에 유교문화에 젖어 있을 그 당시 기독교가 서양 선교사들을 통하여 한국에 전파 되었으나 조상에 대한 제사 풍습과 제도 방식 등의 차이와 오해로 기독교는 부모나 조상들도 모르는 불효의 종교로 잘 못 받아 드려져서 많은 박해와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인 효의 가르침과 기독교 문화에 대한 인식부족과 잘못된 선입관에서 오는 결과이다.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부터 유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공자(BC 551-478)나 불교의 석가모니(BC 563년 출생) 가 태어나기 전 약 천 년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모세(BC 1530년)를 통하여 시내 산 에서 십계명을 주셨고 제 5계명인 대인관계에서 첫 번째로 부모를 공경 하라고 “효” 의 명령을 내리셨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성경이요 또한 교리와 생활 교본도 성경을 기초로 하고 있다. “효”에 관한 기독교적 근거는 하나님께서 직접 두 돌판 에 기록하여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에 포함된 것으로 모세오경 중 출애굽기와 신명기 등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효의 원조 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며 또한 성경은 성 효경(聖 梟獍)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BC 551-478) 효(孝)란 백행지본, 백행지원이라 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창조주요 인간의 조물주이신 참 신이신 절대 주권자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 상호간 지켜야할 십계명의 첫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효를 행하는 절대 명령으로 주셨다. 부모 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에베소서 6장2절)이다. 즉 기독교의 효(孝 )는 그 근본이나 시작이 인간의 이성이나 관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만세 전부터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따라서 하나님 중심이 인간의 도리이며 권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효는 역사적으로나 정체성과 권위 면에서 타 종교와 다른 이성적 추구 집단에서 강조하고 있는 효(孝)와 는 차별 되었고 다른 종교의 효 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강화된 효(孝)라고 특징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공경 즉 효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취사선택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기독교인 들은 반드시 효를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명령) 이요 사랑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나를 낳아 주시고 사랑으로 키워주시고, 가르치시고 성장시켜주신 부모님께 드리는 보은의 삶이다. 기독교적인 효 는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일 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는 절대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계명을 주시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요 피조물인 인간을 특별한 하나님의 형상의 모양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약속하신 말씀이요 약속이다. * 딤.후 3:15-16절 : -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 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가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kcorakd과 바르게 함과 의 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요 5:39절 :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 요 20:31절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나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 라... Rev. 한요한 D.Min. E –mail : hany77777@hanmail.net Cell phone : (010-9079-0049) - 국제신학대학교 졸업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신학대학원) M.Div졸업 - 개혁신학연구원 목회학석사(M.Div)졸업 - 미국, 쉐퍼드대학교 신학대학 목회학박사(D.Min)졸업 - 미국, 코헨대학신학박사, 객원교수 - 21세기 지구촌복음화 부흥협의회 총재 - 교회본질 회복운동본부 총재 - 부패방지 국민운동본부 연합회장 - 원주충만교회 담임목사 - 저서 : 기독교 효 신앙 교육 - 칼럼 : 기독교신문 외 다수 고정칼럼 연재 - 강연 : 국내외 1,000회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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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효
    2021-05-25
  • [목회칼럼] 설교 잘 듣기(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친목회 회원이 된다거나 새로운 취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정규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아무리 설교를 들어 보아도 그것은 무익할 뿐이다. 아무리 설교가 훌륭하더라도, 따분하고 화나게 하며, 혼란스럽고 외면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말씀이 말씀이 결코 달고 오묘하지 않다. 바울이 이 점을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바울은 같은 장에서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을 수 있는 기능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죄로 가득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완전히 무지하고 불감한 상태이 때문에 설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아주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얼마가지 않아서 외면해 버리고 만다. 필자는 고1학년 때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친척집에 있었는데 그 집이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따라 다녔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 없는 시간은 설교시간이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없도 교감도 없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후에는 창세기 1:1절부터 다 믿어질 뿐 아니라 어느 말씀을 들어도 꿀송이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에 끌려 나온 사람의 처지가 그러할 것이다. 사회적인 또는 사업상의 이유로 자주 교회에 출석하고 얼핏 보기에 진실 된 것처럼 보이는 신앙고백을 한다 하더라도, 진지하고 성경적인 설교에 대하여 약간의 관심을 갖거나 아니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눈에 띄지 않게 잘 위장하고 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거스르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설교에 대하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선입견은 항상 말씀으로 소통하는 것을 방해한다. 소망교회 원로 목사이신 곽선희 목사님은 ”듣지 않으려는 사람과 행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의뢰하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믿지 않는 다면 설교에서 유익을 얻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설교에서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기 위해서 듣는 자는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의 등급이 아니고 성령을 모신 사람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하셨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 : 9, 10, 15, 16). 이미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캄캄한 어둠속에서는 그 어느 것도 볼 수 없듯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없이는 진리를 보거나 들을 수 없다. 성령은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바꾸시고 삶의 모든 거승ㄹ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주신다. 성령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능을 갖게 해주신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는가 하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말씀의 선포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비춰 본다면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 복된 소식을 선포하도록 어디에나 설교자들을 보내셨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당장 성경을 진실 되게 전파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씨가 뿌려지고 나면 모든 것이 땅의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 밭에 관한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씨의 문제가 아니라 땅의 문제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이렇게 표현한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 설교가 단순히 고막을 때리는 파장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믿음으로 합해져야 한다. 좋은 씨가 좋은 밭에 뿌려지기 전에 먼저 좋은 밭을 만들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곡식을 잘 가꾸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비유에 따르면 좋은 밭이라도 서로 다른 소출을 낸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13:8).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의 영혼에 풍작을 거두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과실을 많이 맺는 신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는 씨를 뿌리시고 과실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매우 방법이다. 설교는 이미 심겨진 곡식에 물과 거름을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들고 지친 영혼이 힘을 얻고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말씀의 역사를 위해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일주일 내내 영혼에 쌓인 딱딱한 흙 덩어리들을 뒤엎고 잡초들을 뽑아냄으로 좋은 씨앗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설교 준비와 선포하는 일에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거기에 못지 않게 듣는 사람도 잘 준비를 해야 한다, 듣는 사람의 준비도 설교자의 준비 만큼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지 않았다면, 설교자의 준비는 헛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2021-05-25
  • [논평] 통 큰 선물과 깜짝 선물의 사이에서 역사적 성과인가, 역사적 과제인가?
    통 큰 선물과 깜짝 선물의 사이에서 역사적 성과인가, 역사적 과제인가? 지난 21일 미국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채 1년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고, 바이든 대통령의 임기는 시작점이다. 우리나라는 이번 정상회담에 통 큰 선물을 준비했다. 4대 기업이 약 44조원에 달하는 미국 투자를 약속하였다. 여기에 미국에서는 우리 국군 55만 명에게 맞힐 코로나 백신을 주기로 하고,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임명하였다. 이를 두고 ‘깜짝 선물’을 받았다고 정부와 여권에서는 호들갑이다. 그래서인가 여권에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국격이 뿜뿜 느껴지는 정상 회담이었다’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였다. 문 대통령도 ‘최고의 순방이었고, 최고의 회담이었다’고 SNS를 통해 자평하였다. 그러나 야권에서는 ‘44조원 주고 물건 대신 어음만 받았다’ ‘요란한 빈 수레와 맞바꾼 기대 이하의 성적표였다’ 심지어 여권으로 구별되는 모 인사는 ‘바이든(미 대통령), 바람난 아내 대하듯 문(대통령) 맞았다’고 혹평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 국민들이 거는 기대는 생명과 연계된 다량의 백신확보였다. 지난 달 일본의 스가 총리는 점심을 굶으면서까지 1억 회분의 코로나 백신을 확보했었다. 또 미국 쪽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이 있기 전, 8천만 회분의 백신을 어느 나라에든지 나눠주겠다는 말도 흘렸었다. 아마도 이를 국민들은 기대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미국 쪽에서는 주한미군과 접촉하는 한국군에 대한 55만 회분의 백신을 준다고 한 것뿐이다. 물론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을 구축한다고 했지만, 이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백신 접종 1차가 7.4%, 2차는 3.4%에 불과하다. 그러니 백신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 아닌가. 따라서 현 정권과 여당이 자화자찬만 할 것은 아니다. 아직도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은 뒤로 하고 미국으로부터 깜짝 선물 받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일상(日常)으로 속히 돌아가지 못하는 속 아픈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 제72차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두 나라의 동맹과 안보에 대한 것을 공고히 한 것은 성과라고 본다. 한국만큼 공산주의에 의하여 혹독한 시련과 국가존망을 경험한 나라가 또 있을까? 우리는 6.25를 통하여 북한, 중공, 소련의 공산주의에 의하여 침략을 당한 나라이다. 또한 71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북한의 핵 위협, 중국의 패권•팽창주의, 러시아의 두 나라와 공조된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일, 세 나라의 안보•경제 공조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동맹과 우방의 도움 없이는 우리의 안보와 국방은 물론, 경제도 제대로 지켜낼 수 없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이 들어와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국가 정상이 만날 때마다, 뭔가 경제적인 것을 추가로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2017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방미한 정상 회담에서는 경제사절단이 15조원 투자+26조원 제품구매로, 2017년 11월 트럼프의 방한한 정상 회담에서는 19조원 투자+63조원 제품 구매의 패키지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문재인 대통령 방미 회담에서는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44조원의 투자 약속을 한 것이다. 물론 투자가 모두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엄청난 투자와 양질(良質)의 일자리를 우리나라에 마련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과 미국은 문화가 다를 수 있다. 이번에 두 정상이 공동기자회견을 한 후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은 질문할 기자의 이름을 부르는데 반해, 한국 대통령은 ‘우리 여기자(女記者)는 왜 손 안드나요?’라고 하여 현장을 당황케 했다고 한다. 미국은 공개 석상에서 여성 우대하는 것을 오히려 ‘성차별주의’로 간주한다. 한국과 미국은 문화뿐 아니라 셈법도 다르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는 국익을 위한 참된 외교를 아는가? 우리나라의 외교는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인가? 정부와 여당이 자화자찬하는 것처럼 미국의 생각도 같을까? 우리 정치가 평소 외교를 제대로 했다면 이 정도 가지고 ‘최고’ ‘최상’이라는 말이 나올까? 그 동안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걱정을 했는데, 이제는 동맹국으로부터 한번 대접을 받았다는 일시적 안도감보다,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안녕을 위한 철저한 국제관계의 준비와 내실 있고 진정성 있는 외교적 실천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역사적 성과를 논하기에 앞서, 역사적 과제를 크게 남기게 되었다고 본다.
    • 오피니언
    2021-05-25
  • [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3)
    3. 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교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300만 전도운동의 전초기지를 각 지역에 마련하기 위해서는 “2,800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 는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이 민족과 국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기치를 들고 나왔다. 이일을 위해서는 중심을 잡고 일하는 사역자가 요구되었다. 우선 70인의 전도 목사를 선정하여 전국에 파송하는 사역이었다. 이를 위해 신학교육을 받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은 사역자가 필요했다. 1948년 8월 서울 남대문 교회에서 야간 신학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그 야간신학교가 대한신학교로 그리고 안양대학으로 전이되기 이전의 연역을 요약한 것이다. 1948년 8월, 남대문 교회에서 야간 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윤필성 목사 취임. 1949년 1월, 서대문구 서소문의 새 건물로 이전하고 2대 교장에 김치선 박사 취임. 1950년 1월, 대한신학교로 개명. 1950년 5월, 제 1회 졸업생 18명을 배출. 1952년 9월, 4년제 각종 대학교로 인가 받음. 1956년 9월, 서울 중구 남산동 소재 교사로 이전. 1962년 3월, 서울 용산구 서계동(현 청파중앙교회) 교사로 이전. 1964년 4월, 학교법인 대한기독학원 인가 받음. 1966년 9월, 4대 교장에 김세창 박사 취임. 1968년 2월, 김치선 박사 별세(69세). 1969년 7월, 군종장교 후보생 지정학교로 인정 받음. 1977년 11월, 안양시에 15,000평 교지매입. 1980년 10월, 5대 교장에 이의완 박사 취임. 1985년 6월, 최순직 박사 학교 재단 이사장 권한대행 취임. 1985년 7월, 이형룡박사 교장 직무대행 시작. 이후에 학교는 빚에 시달리다가 채권단들에게 학교를 넘겨주게 되고 김세창 박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학교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채권단들은 당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당시의 천문학적인 빚 25억원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학교를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최순직 교수와 그분의 아내 되시는 김치선 박사의 둘째 딸 김동화 사모께서는 소나기처럼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께서 세우신 신학교를 자유주의 영역에 넘겨주다니... 하시며 넋을 잃고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대신교단이 설립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과정이 있다. 원래 대한신학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야간신학교로 출발하였다. 1948년은 한국교회사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신학교들에 관한 사건들이 일어난 해이다. 해방 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한 김재준 박사와 동정녀 탄생을 옹호한 박형룡 박사 사이에 일어난 두 신학자들의 갈등은 신학교의 분리는 물론 교단의 분리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서울 창동 교회에서는 1948년 5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총회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같은 해 대한신학교 모체인 총회신학교 야간신학교가 개설되었다.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 설립된 조선신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의 모체가 되었고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신학교가 되었다. 신학이란 이름으로 성경의존사상을 신앙하는 신학을 거역하는 묘하고 잡다한 단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한신학교가 자유주의자의 손에 넘어간 가장 기초적인 원인은 교회사적 정통주의 개혁파 신학을 강조한 최순직 교수를 대한신학교에서 배제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세창 박사는 대한신학교의 신학적 노선이 제기 될 때마다 항상 그분은 개혁파 신학에 대한 다른 의견을 개진하였다. 개혁이란 말을 꼭 근본주의에다 대입시켜 다른 견해를 첨가하였다. 같은 보수주의 노선인데 왜 개혁신학만을 강조 하느냐? 는 주장을 내세웠다. 최순직 교수는 가장 객관적인 교회사적 신앙고백에 의존하지 않고 김세창 박사가 무조건 부친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일방적인 근본주의에서 떠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최순직 교수는 김치선 박사의 공로와 당시의 김치선 박사가 처한 시대 상황을 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이해하면서 개혁파 신학으로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확정 시키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세창 박사는 무조건 아버지의 사상에만 집착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고 강의 시간마다 개혁주의라는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 다시 해방 후의 역사로 돌아가 보자. 1948년 5월 20일 조선신학교와의 갈등으로 창동교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총회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즉 자유주의와 절연하고 참다운 성경중심의 신학교를 세우자는 취지였다. 이 사건은 신학이 단순한 신학의 개념만을 의미하는 역사가 아니었다. 신학은 교회의 앞날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교단의 미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당시의 교수들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권세열, 겸임으로 한경직, 명신홍, 그리고 이자익 목사 등이었다. 그런데 1948년 같은 해 야간 신학교를 개설하게 된 것은 이미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의 독립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총신과의 갈등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간으로 운영하던 대한신학교는 김치선 박사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여 총신 본교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모이고 있었다. 졸업생들도 교회개척의 앞잡이가 되어 각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구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1957년을 계기로 하여 장로회 총회에서는 대한신학교를 장로회 총회신학교 야간부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기에서 김치선 박사는 “지금까지 여러 교파에서 보조를 조건으로 자기들의 교단신학교로 운영하자는 수많은 제안을 거절해 왔는데 이제 와서 총회신학교 야간부로 편입할 수 없다.” 고 생각하고 1957년 여름에 40일 작정기도에 들어갔다. 대한신학교는 김치선 박사의 생명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한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갈등이 증폭되어 갈 때 총회측에서 김치선 박사의 신학을 시비 걸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것은 개혁파 신학이 아니고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점이다. 당시 총신측에서도 다수의 목사들이 근본주의 사상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타인을 흠집 내기 위하여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타인의 흠집만을 들추어내는 사악한 일을 행한 것이다. 결국 대한신학교는 독립적으로 운영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적 배경도 없고 졸업생들은 총회에 가서 안수를 받고 사역지를 구할 수 있는 길이 막막했다. 더구나 당시 정부의 방침이 하달되었는데 하나의 신학교는 하나의 교단을 배경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근본주의를 강하게 추종하는 ICCC 총재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와 연관을 맺어 성경장로회라는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1961년 6월 21일 제 1회 창립총회를 열고 초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를 선출하게 되었다. 이후에 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교는 더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한신학교와 한양교회와의 갈등에 더하여 정부와의 소송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한양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김치선 박사는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2,500평의 땅을 취득하여 대한신학교를 같은 장소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교회는 교회대로 땅을 많이 차지하려고 하고 학교는 땅을 분할하여 양쪽이 똑 같이 차지하겠다는 충돌이 일어났다. 더불어 당시 정부의 방침은 그 땅에 KBS 서울 중앙방송국을 세우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당시 공보부 장관이었던 오재경씨는 기독교 장로로서, 그의 부친이 김치선 박사와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정부의 편을 들어 방송국을 세우겠다고 통보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국가에서 이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정부를 상대로 송사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양교회와 대한신학교는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하지도 못한 채 9년에 걸친 정부와의 소송에 일방적으로 밀려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때 ICCC 총재 맥킨다이어 박사의 도움으로 용산구 서계동 33-2, 구 쏘련 영사관 자리인 현재 청파 중앙교회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한 가지의 작은 인간적 갈등은 후에 극심한 분열을 일으킨 인류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신학적 사상은 더욱 그렇게 되어 온 교회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근본주의냐? 개혁파 신학이냐? 의 신학적 이슈는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에 있어 1970년대 이전에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신학적 이식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1970년대 이전에는 한국교회가 근본주의냐? 개혁파 신학이냐? 의 갈등이 없었고 서로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에 한국교회 안에 개혁파 신학이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무천년주의가 확산되고 언약론이 확대되고 또 다른 세력인 번영신앙이 기성 교외의 틀을 흔들기 시작하면서 신학적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제도는 장로교회로 신학은 개혁파로 교단의 정치와 대한신학교의 교리를 정립하려는 기치를 들고 나온 분이 최순직 목사였다. 이러한 기치를 정립하기위해 한 가지 정리해야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찾아온 ICCC와의 결별이었다. 최순직 목사는, 그분의 식구들은 물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계동33-2의 땅을 마련해 준 ICCC로부터 파송된 마두원(馬斗元, P.R. Malsbury) 선교사를 찾아가 그 땅의 원금을 갚았다. 그 돈은 학교를 잘 운영하여 조금씩 저축한 것이었다. 마두원 선교사는 그 원금을 받아들고 너무 기뻐하면서 “평생에 한국에 와서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제 대한신학교는 홀로 서는 길이 남아 있었다. 피눈물을 쏟아 대한신학교를 건설해온 김치선 박사, 최순직 교수, 그리고 그 주위의 인물들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대신의 신학이 좌경화 되어 안양대학으로 변질된 현 상황을 보고 땅을 치며 숨이 넘어갈 입장일 것이다. 우리는 개혁파 신학을 주장하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교수들의 견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신학의 변질을 막아야 한다. 그 신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는 신학교는 절대 성경의존주의 신학만을 중심으로 학교를 경영해야 한다. 신학 이외의 일반대학을 유치할 경우 신학이 좌경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미국의 하버드, 예일,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가 처음에는 아주 건실한 복음주의 신학을 기초로 하여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일반대학의 유치로 말미암아 신학이 좌경 되었다.” 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또 강조하기를 “그래서 지금 모든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들이 일반대학을 배제하고 신학대학원(Theological Seminary) 제도와 성경 대학(Bible College) 제도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 절대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하고, 교단의 정치를 배제하고, 그리고 일반대학 유치를 배제해야 올바른 신학을 유지할 수 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돌이켜 보면 안양대학이 과거 유럽과 미국의 자유화 된 신학교의 전철을 밟아왔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학의 변질은 보통 80년을 넘지 못하고 보수주의 신학이 퇴락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20기에 들어오면서 미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인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으로 인하여 곤욕을 치룬 후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들은 거의 모두가 교단의 정치적, 재정적, 그리고 연합이라는 명분을 버리고 단독적인 사설 신학의 경영을 유지해 오고 있다. 오직 신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미국의 보수주의 개혁파 신학교들은 100년이 넘어서는 현 시점에서도 신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으며 교회는 복고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순직 교수는 70년대 들어와 이제 대신은 대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대신의 황금시대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교단의 명칭도 대신으로 정정하여 명명했다. 이제 대신의 김치선 박사와 교단과의 문제를 잠간 언급해야 할 차례이다.
    • 오피니언
    • 특별기회
    2021-05-25
  • [가정예배] 감정대로 살지 맙시다.
    찬송: 301장 기도: 가족중에서 성경: 창세기 32:20절 코로나가 언제 극복될지는 모르겠지만 극복은 된다는 희망적인 환경들이 많이 조성된 것 같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야곱이 하란의 외삼촌 라반 집에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 있어 연단과 훈련으로 지내다가 때가 이르매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말씀대로 다 이루어 아버지 집으로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축복의 땅으로 봅니다. 얍복강만 건너면 고향 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야곱을 죽이겠다고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과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할 것은 야곱을 죽이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형의 모습을 야곱은 어떻게 잘 대처했을까요? 형 에서는 어찌 보면 20여년 전에 자신을 속인 야곱이 장자권과 아버지로부터 모든 축복을 다 뺏어 갔다는 피해의식으로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한이 맺히게 살아왔을 형 에서는 감정이 복받쳐 야곱을 죽이려고 얍복강에서 기다립니다. 물론 팥죽 사건과 양을 잡아다가 이삭으로부터 싹쓸이 축복을 받았던 사건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특별히 형의 눈으로 보면 사기일 수도 있고, 속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할 자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에서의 행태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잖아요? 이방 여인과 결혼도 하고, 부모의 마음에 근심까지 끼칩니다. (창26:34, 27:46, 28:6-9)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리브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둘째 아이를 큰 민족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창25:22-23) 리브가에게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통하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게끔 전략을 세운 것입니다. 어쨌든 에서로써는 억울한 일입니다. 분통이 터질 일입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기다리며 쌓이고 쌓였던 감정을 이제 얍복강에서 금이한양 하는 야곱을 죽이려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할 수도 있지요. “나를 20년 동안 그렇게 훈련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시고 고향으로 오게 하시더니 고향 문 앞까지 와서 결정적으로 나를 죽이십니까?” 이렇게 원망 할 수도 있을 텐데 야곱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형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을 합니다. 형의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솟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형의 감정만 달래면 이 상황은 그냥 끝날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죽일 만큼 군사를 이끌고는 왔지만 내가 형의 감정을 진정시키면 감정적으로 나오는 형을 이해시키고, 야곱의 마음과 정성을 보이면 형은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형제애의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느낌대로 시도해 봅니다. (창32:4-5) 이것은 감정의 문제이기에 감정을 푸는 일을 야곱은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악화시키는 최악의 선택은 화를 내고 싶을 때 화를 내고, 분을 내고 싶을 때 분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야곱을 통해서 감정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위대한 인물이었던 모세를 생각해 보세요! 모세는 자기의 감정을 순간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감정적으로 수행했을 때 감정적으로 처리한 일로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욥을 보세요! 욥은 엄청난 고난을 겪습니다. 그 고난의 상황에서 위로한다고 친구들이 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 부인마저도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차라리 죽으라고 합니다. (욥2:9)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질 안 했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께 자기의 감정적 언사를 사용하지 안 했습니다. 이런 고난의 연속 속에서도 절대로 자기의 감정대로 살지 않았고, 오직 은혜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단련시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하루 아침에 다 망해버렸어요. 그러면 보통 사람 같으면 원망할 수도 있잖아요? “아이고 나 죽겠네! 나 죽었네! 이제 나는 끝났네!” 뭐 이럴 수도 있잖아요? “요놈의 망할 놈의 세상 막 하면서….” 어쨌든 그런 별의별 원망의 소리를 내뱉을 수도 있었지만, 욥은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정을 다스리는 자의 복입니다. 감정을 다스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은 욥의 감정을 배워야 합니다. 이래야 처음보다 나중이 더 창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결국은 에서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잖아요. 오히려 에서가 더 긍휼히 여겨 입 맞추고, 껴안아 줍니다. 죽이려고 했던 감정을 껴안고 입 맞추는 사랑의 감정으로 만들어 버린 야곱! 물론 배후에는 간밤에 씨름하셨던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왔다 할지라도 나는 선으로 그 사람을 대하면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상대편을 대하십시오. 화를 낼 수밖에 없고 감정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때 한 번 더 참으시고 하나님께서 오늘도 도와주실 믿고, 일이 좀 잘 안 풀리고 힘들더라도 하나님 사랑으로 이겨냅시다. 모든 사람을 감정대로 대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면 우리 자신도 자존감이 높아져서 좋고 여러모로 좋은 것입니다. 얍복강의 죽음 앞에서도 야곱은 형의 감정을 잘 풀어낼 수 있는 침착함.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과의 씨름하는 이런 모습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기에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강점 억제력을 우리 가정도 야곱을 통해서 더불어 욥의 인내까지 함께 본받아서 절대로 감정대로 살지 마시고 극한 상황이 올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사모하고 참고 인내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기도문으로 마칩니다.
    • Mission
    • 가정예배
    202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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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8
  • [가정예배] 가나혼인집에서 있었던 기적
    - 찬송: 309장 - 기도: 가족중에서 - 성경: 요한복음 2장 5절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아멘 제목: 가나혼인집에서 있었던 기적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신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로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있었던 기적의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이제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친척 집에 혼인이 있어 그 전통 전례에 따라서 가족 친지 애경사에 참석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혼인 잔치에 가셨지만, 혼인집에 큰 관심은 두시질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어머니의 간청에 따라 가나 혼인집에 갈 수도 있었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냥 혼인 잔칫집이려니 하고 가셨지만, 마리아는 아닙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가나에서의 혼인집과 마리아와의 관계는 상당히 특수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혼인 집에서 마리아의 역할은 자기 일처럼, 또는 자기 집 일처럼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도록 관심을 가지셨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살피는 가운데에 이제 혼인은 진행이 되었고 또 잔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초대되어 온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오셨기에 준비되었던 포도주가 금방 바닥이 났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마리아가 발견한 것입니다.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고 또 그 혼가에 있어서 어찌 보면 자존심이고 얼굴인데, 포도주가 중간에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한창 무르익어가는 잔치에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초대된 손님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또 그렇게 준비성도 없는 가정이라고 하는 낙인이 걱정으로 밀려온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상당히 난처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당장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포도주를 어디에서 준비해 올수도 없는 것이고 이런 때, 마리아는 해결책을 생각하고 그 즉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기적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기치 않는 일을 만났을 때나 혹은 난처한 일들을 만났을 때,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는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다양한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잖습니까? 그런 문제들이 우리에게 힘에 겨울 때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내가 풀려고 하면은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찾아서 주님께 부탁하면 쉽게 해결이 되지요. 이런 경우를 우리가 경험적으로 나타날 때, “아! 이럴 때 주님이 내게 계셔서 문제를 쉽게 해결해 주시고 나로 순탄한 길을 가도록 만들어 주셨구나!” 하는 그 경험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니 힘든 시간은 길어지지요. 다시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마리아는 그런 난처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예수님을 찾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별 그렇게 반응이 없습니다. “아직 내 때가 아닌데 뭘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시는 반응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기에 하인들을 불러서 “너희들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든지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라.”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다짐의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께는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셨고, 하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기적의 현장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영적인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이 상황을 본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본 상황대로만 된다면 오늘 이 혼인 잔치에 기적이 일어난다.!! 하는 그 믿음! 예수님을 보면서 그 기적을 내다본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내 삶에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야 내 삶이 변화되는 걸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을 때 한 가지 다짐은 오직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면 나는 그분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순종할 마음이 없는데 주님을 찾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았고, 하인들에게는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시지요? 마리아의 생각은 이게 잘 어우러지게 되면은 그다음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하는 믿음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할 때, 모든 문제는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가나 혼인 잔칫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채웠습니다. 하인들은 그냥 채운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해서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이것은 더는 채울 수 없을 만큼 다 채웠다는 의미입니다. 하인들 보세요! 이왕에 물을 채우라 하셨으니 가득 채워 버린 것이지요. 순종은 그렇게 통 크게 해야 큰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니 열심히 갔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보는 땅, 밟은 땅을 내가 다 너에게 줄 것이다. 그랬더니 엄청나게 밟았고 헤브론까지 올라가서 엄청나게 바라봤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든 그 말씀을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합니다. 한 발 더 앞서 이행을 해야 합니다. 가령 하인들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했어요. 그런데 반만 채웠다면 기적은 그 반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충만하게 채웠을 때는 그 기적은 충만하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기적을 적게 보기를 원하십니까? 크게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찾을 바에는 그 말씀을 따라서 충만하게 순종하세요. 충만하게 순종을 하시면 충만한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혼인 잔칫집을 통해서 본받는 교훈입니다. 문제 앞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혼인집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혼인집에 초대됐던 사람들이 그 가정을 칭찬하고 그 가정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찾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가정에도 이런 역사가,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를 믿으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적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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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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