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6-14(월)
 

3. 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교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300만 전도운동의 전초기지를 각 지역에 마련하기 위해서는 “2,800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 는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이 민족과 국가가 일어날 수 있다는 기치를 들고 나왔다. 이일을 위해서는 중심을 잡고 일하는 사역자가 요구되었다. 우선 70인의 전도 목사를 선정하여 전국에 파송하는 사역이었다. 이를 위해 신학교육을 받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은 사역자가 필요했다. 19488월 서울 남대문 교회에서 야간 신학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그 야간신학교가 대한신학교로 그리고 안양대학으로 전이되기 이전의 연역을 요약한 것이다.

19488, 남대문 교회에서 야간 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윤필성 목사 취임.

19491, 서대문구 서소문의 새 건물로 이전하고 2대 교장에 김치선 박사 취임.

19501, 대한신학교로 개명.

19505, 1회 졸업생 18명을 배출.

19529, 4년제 각종 대학교로 인가 받음.

19569, 서울 중구 남산동 소재 교사로 이전.

19623, 서울 용산구 서계동(현 청파중앙교회) 교사로 이전.

19644, 학교법인 대한기독학원 인가 받음.

19669, 4대 교장에 김세창 박사 취임.

19682, 김치선 박사 별세(69).

19697, 군종장교 후보생 지정학교로 인정 받음.

197711, 안양시에 15,000평 교지매입.

198010, 5대 교장에 이의완 박사 취임.

19856, 최순직 박사 학교 재단 이사장 권한대행 취임.

19857, 이형룡박사 교장 직무대행 시작.

 

이후에 학교는 빚에 시달리다가 채권단들에게 학교를 넘겨주게 되고 김세창 박사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학교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채권단들은 당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당시의 천문학적인 빚 25억원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학교를 넘겨주고 말았다. 당시 최순직 교수와 그분의 아내 되시는 김치선 박사의 둘째 딸 김동화 사모께서는 소나기처럼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께서 세우신 신학교를 자유주의 영역에 넘겨주다니... 하시며 넋을 잃고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대신교단이 설립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과정이 있다. 원래 대한신학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야간신학교로 출발하였다. 1948년은 한국교회사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신학교들에 관한 사건들이 일어난 해이다. 해방 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한 김재준 박사와 동정녀 탄생을 옹호한 박형룡 박사 사이에 일어난 두 신학자들의 갈등은 신학교의 분리는 물론 교단의 분리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서울 창동 교회에서는 19485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총회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같은 해 대한신학교 모체인 총회신학교 야간신학교가 개설되었다.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 설립된 조선신학교는 한국신학대학의 모체가 되었고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신학교가 되었다. 신학이란 이름으로 성경의존사상을 신앙하는 신학을 거역하는 묘하고 잡다한 단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한신학교가 자유주의자의 손에 넘어간 가장 기초적인 원인은 교회사적 정통주의 개혁파 신학을 강조한 최순직 교수를 대한신학교에서 배제한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세창 박사는 대한신학교의 신학적 노선이 제기 될 때마다 항상 그분은 개혁파 신학에 대한 다른 의견을 개진하였다. 개혁이란 말을 꼭 근본주의에다 대입시켜 다른 견해를 첨가하였다. 같은 보수주의 노선인데 왜 개혁신학만을 강조 하느냐? 는 주장을 내세웠다.

최순직 교수는 가장 객관적인 교회사적 신앙고백에 의존하지 않고 김세창 박사가 무조건 부친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일방적인 근본주의에서 떠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최순직 교수는 김치선 박사의 공로와 당시의 김치선 박사가 처한 시대 상황을 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이해하면서 개혁파 신학으로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확정 시키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세창 박사는 무조건 아버지의 사상에만 집착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고 강의 시간마다 개혁주의라는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

다시 해방 후의 역사로 돌아가 보자. 1948520일 조선신학교와의 갈등으로 창동교회에서는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총회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즉 자유주의와 절연하고 참다운 성경중심의 신학교를 세우자는 취지였다. 이 사건은 신학이 단순한 신학의 개념만을 의미하는 역사가 아니었다. 신학은 교회의 앞날을 결정하는 기준이며 교단의 미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당시의 교수들은 박형룡, 김치선, 계일승, 권세열, 겸임으로 한경직, 명신홍, 그리고 이자익 목사 등이었다.

그런데 1948년 같은 해 야간 신학교를 개설하게 된 것은 이미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의 독립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총신과의 갈등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간으로 운영하던 대한신학교는 김치선 박사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여 총신 본교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모이고 있었다. 졸업생들도 교회개척의 앞잡이가 되어 각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구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1957년을 계기로 하여 장로회 총회에서는 대한신학교를 장로회 총회신학교 야간부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기에서 김치선 박사는 지금까지 여러 교파에서 보조를 조건으로 자기들의 교단신학교로 운영하자는 수많은 제안을 거절해 왔는데 이제 와서 총회신학교 야간부로 편입할 수 없다.” 고 생각하고 1957년 여름에 40일 작정기도에 들어갔다. 대한신학교는 김치선 박사의 생명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한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갈등이 증폭되어 갈 때 총회측에서 김치선 박사의 신학을 시비 걸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것은 개혁파 신학이 아니고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점이다. 당시 총신측에서도 다수의 목사들이 근본주의 사상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타인을 흠집 내기 위하여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타인의 흠집만을 들추어내는 사악한 일을 행한 것이다.

결국 대한신학교는 독립적으로 운영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적 배경도 없고 졸업생들은 총회에 가서 안수를 받고 사역지를 구할 수 있는 길이 막막했다. 더구나 당시 정부의 방침이 하달되었는데 하나의 신학교는 하나의 교단을 배경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근본주의를 강하게 추종하는 ICCC 총재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와 연관을 맺어 성경장로회라는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1961621일 제 1회 창립총회를 열고 초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를 선출하게 되었다.

이후에 김치선 박사와 대한신학교는 더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한신학교와 한양교회와의 갈등에 더하여 정부와의 소송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한양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김치선 박사는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2,500평의 땅을 취득하여 대한신학교를 같은 장소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교회는 교회대로 땅을 많이 차지하려고 하고 학교는 땅을 분할하여 양쪽이 똑 같이 차지하겠다는 충돌이 일어났다.

더불어 당시 정부의 방침은 그 땅에 KBS 서울 중앙방송국을 세우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당시 공보부 장관이었던 오재경씨는 기독교 장로로서, 그의 부친이 김치선 박사와 절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정부의 편을 들어 방송국을 세우겠다고 통보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국가에서 이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정부를 상대로 송사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양교회와 대한신학교는 서로간의 갈등을 해소하지도 못한 채 9년에 걸친 정부와의 소송에 일방적으로 밀려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때 ICCC 총재 맥킨다이어 박사의 도움으로 용산구 서계동 33-2, 구 쏘련 영사관 자리인 현재 청파 중앙교회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한 가지의 작은 인간적 갈등은 후에 극심한 분열을 일으킨 인류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신학적 사상은 더욱 그렇게 되어 온 교회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근본주의냐? 개혁파 신학이냐? 의 신학적 이슈는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에 있어 1970년대 이전에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신학적 이식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1970년대 이전에는 한국교회가 근본주의냐? 개혁파 신학이냐? 의 갈등이 없었고 서로의 신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에 한국교회 안에 개혁파 신학이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무천년주의가 확산되고 언약론이 확대되고 또 다른 세력인 번영신앙이 기성 교외의 틀을 흔들기 시작하면서 신학적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제도는 장로교회로 신학은 개혁파로 교단의 정치와 대한신학교의 교리를 정립하려는 기치를 들고 나온 분이 최순직 목사였다. 이러한 기치를 정립하기위해 한 가지 정리해야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찾아온 ICCC와의 결별이었다. 최순직 목사는, 그분의 식구들은 물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계동33-2의 땅을 마련해 준 ICCC로부터 파송된 마두원(馬斗元, P.R. Malsbury) 선교사를 찾아가 그 땅의 원금을 갚았다. 그 돈은 학교를 잘 운영하여 조금씩 저축한 것이었다. 마두원 선교사는 그 원금을 받아들고 너무 기뻐하면서 평생에 한국에 와서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제 대한신학교는 홀로 서는 길이 남아 있었다.

피눈물을 쏟아 대한신학교를 건설해온 김치선 박사, 최순직 교수, 그리고 그 주위의 인물들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대신의 신학이 좌경화 되어 안양대학으로 변질된 현 상황을 보고 땅을 치며 숨이 넘어갈 입장일 것이다. 우리는 개혁파 신학을 주장하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교수들의 견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신학의 변질을 막아야 한다. 그 신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는 신학교는 절대 성경의존주의 신학만을 중심으로 학교를 경영해야 한다. 신학 이외의 일반대학을 유치할 경우 신학이 좌경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미국의 하버드, 예일,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가 처음에는 아주 건실한 복음주의 신학을 기초로 하여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일반대학의 유치로 말미암아 신학이 좌경 되었다.” 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또 강조하기를 그래서 지금 모든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들이 일반대학을 배제하고 신학대학원(Theological Seminary) 제도와 성경 대학(Bible College) 제도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 절대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하고, 교단의 정치를 배제하고, 그리고 일반대학 유치를 배제해야 올바른 신학을 유지할 수 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돌이켜 보면 안양대학이 과거 유럽과 미국의 자유화 된 신학교의 전철을 밟아왔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학의 변질은 보통 80년을 넘지 못하고 보수주의 신학이 퇴락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20기에 들어오면서 미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인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으로 인하여 곤욕을 치룬 후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들은 거의 모두가 교단의 정치적, 재정적, 그리고 연합이라는 명분을 버리고 단독적인 사설 신학의 경영을 유지해 오고 있다. 오직 신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 결과 미국의 보수주의 개혁파 신학교들은 100년이 넘어서는 현 시점에서도 신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으며 교회는 복고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순직 교수는 70년대 들어와 이제 대신은 대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대신의 황금시대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교단의 명칭도 대신으로 정정하여 명명했다. 이제 대신의 김치선 박사와 교단과의 문제를 잠간 언급해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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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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