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7(화)
 

5. 개혁파 신학의 확립 시대

 

왜 갑자기 김치선 박사의 역사를 말하면서 개혁파 신학을 들고 나오느냐? 라고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안양대학과 교단의 정체성에 대한 아주 중대한 이슈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역사를 되돌아 볼 때 대신교단이 그 역사를 여지없이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은 몸으로 비유할 때 가장 중요한 뼈대와 뇌의 조직에 해당한다. 겉으로 볼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기관이지만 몸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신학은 현실 적용에 있어 전혀 무용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교리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신학이 비성경적이면 그 교회는 반드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마의 소굴이 되어버리게 된다. 오직 개혁파 신학만이 교회를 튼튼하게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교회의 역사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300여 년간 극심한 박해를 받은 교회는 사도신조를 중심하여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정통신학으로 확립한 후 중세를 지배하는 조직체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중세교회의 타락이 수많은 순교자들을 양산해 낸 후 종교개혁 신조를 탄생시키고 복음이 유럽을 기점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교단의 신학으로 지정한 것에 대하여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신이라는 이름으로 교단의 신학과 총회의 정치를 확립하신 분은 최순직 목사이시다. 1972년 제 7회 총회를 통하여 최순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그 총회장을 통해 1973년도에 이르러 교단 선언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최순직 목사와 조석만 목사 두 분이 함께 그 문장을 수없이 고쳐가며 다시 첨가하고 또 삭제하는 것을 반복 또 반복하였다. 그 내용의 전문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 서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우리 교단의 헌법은 장로회신조 및 정치원리를 따라 교회를 치리함에 있어 준용하여야 할 규범이다. 그런고로 우리 장로회 총회는 역사적 표준을 따라 헌법을 만들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 총회는 개혁주의 노선으로 교리체계를 확립하여 교회선언문을 채택하여 전국 교회에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개정 헌법이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마땅히 승인되고 준행케 할 법이 되기 바라며 또한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할 표준 법규가 될 줄 알아 이를 공포 발간하는 바이다.”

 

대신교단의 모든 신학과 정치체계를 구성해 놓고 최순직 교수는 1975년 연구차 임시 2년간만 체류하기로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후에 김세창 박사를 옹호하는 가족들은 최순직 교수로 하여금 아예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해를 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방배동 장종현 박사가 운영하는 신학교 교수로 청빙되어 가는 일까지 방해한 사실을 필자가 옆에서 볼 때 심히도 가슴이 아팠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최순직 교수는 꿈에라도 대신을 잊을 수가 없어 언제인가 돌아갈 생각을 품고 계셨다.

 

필자가 대한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로 청빙을 받아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 안양 석수동 대한신학교 특강 초청을 받아 한국에 들렀을 때 최순직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어떻게 하면 대신으로 다시 합류할 수 없을까? 하는 문제를 숙의하기 위해서였다. 최순직 교수께서 기회만 되면 대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와 대신의 중요한 인사들의 의견을 개진해 보았다. 이상하게도 모두 반대 의견을 내 놓았다. 알고 보니 최순직 교수가 돌아오게 되면 비 개혁파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총회에서도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게 됨으로 안 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거기서 대한신학교의 교리적 성장과 교단의 양적 성장은 어느 한 지점에 이르러 정점을 찍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최순직 목사의 사모 되시는 김동화 선생의 증언을 그대로 옮기면 김세창 목사는 우리 가족을 미국으로 이민 가게 한 것은 사실상 대한신학교에서 최목사를 밀어내기 위한 공작이었다. 학교를 김세창 목사의 원대로 경영하기 위해서는 최목사를 내 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2년이 지나도 최목사를 다시 초청하지 않고 김세창 목사의 측근들을 학교의 교직원으로 배치해 버리고 말았다.” 라는 것이다

 

김세창 목사의 아버지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는 신학으로 이어져 근본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신앙화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최순직 교수는 교회사적 객관주의적 신앙고백주의에 기초한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 두 분의 신학적 대립은 대신의 신학적 혼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김치선 박사의 선교적 개척정신과 최순직 교수의 개혁파 신학이 공존 했으면 아마 한국에서 최고의 신학교와 교단으로 성장했다고 생각되어진다.

 

김치선 박사의 신학은 비록 근본주의적이라고 하지만 그분의 설교와 저서를 탐독해 보면 개혁파 신학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물론 당시에는 강한 세대주의적 요소를 주장하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 하지만,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수학한 경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영향을 받은 김치선 박사는 강한 민족주의가 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김치선 박사의 선교정신과 최순직 교수의 개혁파 신학이 한세대가 지난 아들 대에 들어와서 접목을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양대의 신학적 좌경화는 교단의 신학적 미래를 예측하게 만들었고 대한신학대학원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은 교단의 신학적 미래와 교단정치의 미래를 예측하게 만들었다. 작금에 와서 교단이 여러 갈래로 찢어진 결과는 누구를 탓할 수 없다고 본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하면 다시 개혁파 신학을 정립하고 교단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가? 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합동측은 헤어졌다가 다시 합한 경험이 있고 통합측은 신학이 자유분방해도 정치적 공통분포를 잘 형성하여 전통을 유지해 나오고 있는 점을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타 교단의 우수한 신학교에 위탁교육을 보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개혁파 정신을 물려줄 수 있는 우리의 후예들을 키워야 한다. 같은 집안에서 자란 아들이라도 양자와 자신의 피를 받아 태어난 아들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개혁파 신학을 후예들에게 전수 시키는 방법은 우리의 힘으로 교단신학을 형성하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영구적인 개혁파 신학과 교단을 유지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학위를 위해서는 미국의 우수한 개혁파 신학교와 연관을 가지는 길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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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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