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6-14(월)
 

2. 김치선 박사의 신학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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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주 목사

김치선 박사의 신학을 정의하는 여러 목소리들을 감지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객관적 배경을 무시하고 상당히 주관적 평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첸 박사의 수제자, 정통 개혁파 신학자, 그리고 가장 보수적인 신학의 근본주의자. 등등의 평가이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신학적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분은 1970년대 대한신학교의 개혁파 신학의 흐름을 주도한 김치선 박사의 둘째 사위 최순직 교수와 그의 아들 김세창 박사의 견해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분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김치선 박사를 모셨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김치선 박사가 근본주의 신학을 표방하였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개혁파 신학을 부분

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두 분들이 그러한 공통점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또 다른 갈등의 요소를 표출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무조건 부친의 근본주의 신학을 수용하려는 김세창 박사와 교회사적 개혁파 신학을 수용해야 지속적이며 객관적인 신학을 수립할 수 있다는 최순직 교수와의 신학적 갈등이 저변에 숨어 있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중요한 언급이 있다. 안양대학의 신학적 변질을 분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1975년 최순직 교수가 

연구차 미국에 들렀을 때를 이용하여 김세창 박사는 비개혁파 교직원들을 대한신학교에 배치하여 버렸다. 그 후로 신학교 내에서의 갈등은 심화되어 각 주장하는 부류마다 자기들만 옳다 하여 잠잠한 날이 없을 정도였다. 한편으로 김세창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한국 최고의 종합대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대한 꿈을 외치고 다녔다.

 

어느 국가이든 또는 단체이든 내부에서 혼란스런 일이 발생할 때는 힘을 발휘하는 곳으로 사람들이 쏠리게 되어있다. 그 힘의 원천은 사람들의 조직, 경제적 실권, 그리고 정치적 우위 등이다. 결국 대한신학교는 경제적 힘과 교육부의 배경을 바탕으로 종합대학이 되어 안양대학으로 변해 버렸고 보수주의 신학은 자취를 감추어 가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어떤 분은 개혁파 신학도 근본주의 신학도 보수주의 신학인데 서로가 공통분포를 형성할 수 없다는 말인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두 부류의 신학은 보수주의 신학으로 명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 현미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본주의 신학은 너무나 단순하고 지엽적인 신학에 한정되어 있다. 그 신학의 주제는 성경의 무오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육체적 재림이다.

 

5가지 신학의 주제는 19세기 유럽의 고등비평주의와 종교혼합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의 반동으로 일어난 교리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다섯 가지를 따로 분류하여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신학적으로 절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이 주장하는 신론, 인간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엽적인 신학을 강조하게 될 때 그 신학이 불원간에 주관화 되어 자유주의로 기울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세기 초엽 근본주의 운동의 뿌리가 되었던 5가지 교리는 1930년대 들어와 절정을 이룬 후 1950년대에 들어와 신근본주의(Neo Fundamentalism) 운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신근본주의 운동이란 강한 주관적인 입장과 더불어 성경의 문자주의를 내세우며 분리주의에 열을 올리는 운동이었다.

 

근본주의의 극단적인 주관주의 신학운동은 1948년에 WCC를 강력 대항하기 위해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를 중심으로 ICCC를 조직함으로 시작되었다. WCC를 대항하는 운동은 잘 한 일이나 ICCC 단체 이외의 어떤 보수주의 신학은 물론 개혁파 신학까지도 정죄해 버리는 분리적인 일에만 피켓을 들고 나온 운동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들의 지엽적인 신학 운동은 결국 신복음주의로 떨어져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신학계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근본주의의 두 가지 신학적 문제점을 발췌해 보면세대주의적 요소와 일반은총론의 배격이다. 세대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달비(John Darby)20세기 초 스코필드(Cyrus Scofield)에 의해 시한부적 전천년주의를 강하게 강조하는 역사적 종말론의 신학이다. 계시록 20장의 천년 기간을 문자적으로 보고 일반 역사와 구별된 획기적인 기간으로 인정하는 신학적 입장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신학적 입장은 일반은총의 배격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그리고 과학 분야를 세상의 일로 취급하고 죄악시 하는 경향성을 드러내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 사상이다. 즉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영역과 사탄의 영역을 대립적인 관계로만 취급한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탄의 영역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응용하시는 허용적 섭리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1920년대 당시의 미국 보수주의 운동은 웨슬리안적 보수주의, 개혁파적 보수주의, 그리고 기타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의 총 집합체를 형성하여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그 대항의 원인은 자유주의자들이 제공했다. 그 자유주의자들은 당시 말도 되지 않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고 나왔다. 상식 이하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신학을 주장하며 성경을 난도질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극단적인 성경 배타주의를 역공하기 위해 미국의 복음적 요소를 소유하고 있는 교회들이 하나의 집합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그 대응전략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신학적 입장인데 하나는, 종말론에 대한 강렬한 신학적 입장과 또 하나는, 합리적이며 과학적 입장을 공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반은총에 대한 배격이 발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많은 신학자들과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온 시기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이었다. 너구나 이러한 근본주의 사상이 가장 활발하게 성행하였던 1930년대 김치선 박사께서 미국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하나의 비화를 소개하면 김치선 박사는 그분의 딸이 교회 행사에 참여하여 율동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너는 잡년이다.” 라는 말을 하셨다는 사건은 그분이 얼마나 일반은총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김치선 박사가 병중에 눕게 되어 오래 동안 침대의 신제를 면치 못하게 되었을 때 온 가족들에게도 TV를 시청하지 못하게 하시다가 너무 무료한 나머지 TV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일화는 그분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저술한 구약사기(The History of the Old Testament)를 살펴보면 구약 역사의 시대적 분류법이 언약론이나 하나님의 주권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 세대주의적인 요소가 깊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나타난 구약의 인물들과 사건들의 발췌는 구약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신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물론 처음 신앙의 세계에 들어온 초 신자라도 그 깊이와 넓이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유효한 저서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냉정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시대의 아들임을 벗어날 수 없다. 1920년대 이후 당시 미국에서는 개혁파 신학의 영역에 속해있는 자들은 물론 웨슬리안주의적 복음주의 자들까지 합세하여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교리적 전쟁을 하는 시기였다. 5가지 신학적 이슈(성경의 오류 주장, 동정녀 탄생 부정, 대속적 죽음 부정, 부활 부정, 그리고 육체적 재림 부정)를 들고 나온 자유주의자들과 교리적 전쟁을 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이 때 김치선 박사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연히 당시의 사상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와 1914년 이후 30년 어간에 세계 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치렀던 세계는 온통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피안을 세계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천년왕국설이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특히 당시 한국교회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거의 근본주의적 천년설을 주장하는 분들이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사경회에 참석하면 거의 모든 강사들이 역사적 종말론에 있어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를 설파하는 설교를 들었다.

 

오늘날의 신학적 입장을 고려해 볼 때 보수주의 영역 안에서 역사적 전천년주의, 후천년주의적 육체적 재림론, 그리고 무천년주의적 재림론 등이 상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시대적 아들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교회론에 있어 당시의 로마 캐톨릭과 제왕들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정교하게 정립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대입해 보면 너무나 원시적인 신학의 피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칼빈의 신학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당시 엄두도 낼 수 없는 정교분리를 주창하고 나선 일은 그 천재성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그가 남김 업적은 너무나 지대하다.

 

당시의 근본주의 운동과 한국의 정세로 볼 때 하나님을 신앙하는 민족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실행하는 운동이었다. 매 맞고, 투옥되고, 그리고 가족이 흩어짐을 당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운동이었다. 그런 면에서 김치선 박사의 신학적 입장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개혁파 신학의 정통성을 유지해야 미래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신앙적 유산을 남겨줄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성장에 있어 월등한 방법론이나 특별한 사회적 이슈를 적용하면 일시적 부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남겨놓은 교회사적 신앙고백의 노선을 버리게 되면 언제인가는 교회가 타락의 길을 면지 못하다는 것이 역사의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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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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