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6-1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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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주 목사

 서 언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와 대신교단의 원조가 되신 분이다. 그분의 역사를 탐구하고 되새겨 보는 일은 앞으로 대신의 역사를 가름하는 중대한 지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는 시공간의 사건에 기반을 두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주권적 해석이 적용될 때 올바른 역사관을 소유하게 되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재산이 된다. 일방적 자기주장을 단편적으로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교회가 걸어온 역사에는 교리적 배경이 시대적으로 나열되어 왔다. 그것이 교회사적 신학이다. 교회사를 뒤돌아보면 역사의 아이러니(Irony)가 지속되어 온 것처럼 느껴진다. 대신의 역사를 되새겨 볼 때 교회사의 한 단편이 나타난 것처럼 느껴진다. 교단의 역사는 교회사적 신학에 기초한 교리교육이라는 반석 위에 정치적 제도를 튼튼하게 세워갈 때 지속적으로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게 된다. 그것이 교회사가 증명한 역사였다. 대신교단이 그 교리교육에 기초하여 교단을 형성해 왔는가? 

 

김치선 박사의 노고를 뒤돌아보고, 당시의 역사를 가감 없이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대신의 역사를 정립하는 작업이 절대 필요한 시점이다. 절대 단편적으로 그분의 애국운동과 그분의 보수적 신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신구약의 교회사적 기준을 통해 당시의 역사를 해석하고 미래 지향적인 신학적 그리고 정치적 역사관을 형성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1. 김치선 박사의 생애


 김치선 박사는 1899년 8월 10일 김영준씨와 최현숙 여사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 그를 가르쳐 준 김응보 선생이 영수로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선생으로부터 전도를 받았고 또한 같은 서당에 다니던 영특한 이홍순이라는 여자 학생 역시 전도를 받고 함께 성경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치선 학생은 후에 이홍순 학생과 결혼하게 되었다. 

 

김치선의 부친 김영준씨는 어업을 경영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나 그 가족에 고난의 회오리가 닥친 것은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되고 부터였다. 40여척의 배와 함께 배에 탄 어부들은 폭풍으로 말미암아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치선의 할아버지는 생명을 잃은 가족들에게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김치선의 가족들을 오막살이 집에 남겨놓고, 영흥으로 돈벌이를 위해 떠났다. 그러나 그는 3년 후 극심한 고생으로 세상을 떠나고 치선의 아버지 영준씨는 1916년 온 가족과 함께 함경도 장진의 화전민으로 들어가 산지를 일구며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함흥에 카나다장로교 선교사 영재영(L. L. Young) 목사가 화전민들이 살고 있는 서호리에 복음을 전하려 왔다. 영재영 선교사는 영특한 소년 김치선을 보고 자신이 데리고 가서 키우겠다고 말했다.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치선을 데리고 와서 가정의 일을 시키며 학교를 다니게 했다. 

 

당시 카나다 선교사들은 다수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기반을 둔 독일의 문서설을 지지하는 신학을 함경도에 거점을 두고 전파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어 김치선에게 전파된 복음은 보수주의 신학에 기반을 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정통주의 신학이었다. 그것은 김치선을 미국에서 보수주의 신학을 공부하도록 주선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영 선교사는 후에 김치선에게 공부할 신학교를 추천할 때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추천해 준 것을 보면 그의 신학적 입장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치선은 1933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치선 박사가 영생중학교를 다닐 때, 지금의 학제로 고등학교 3학년 나이에, 1919년 3.1 운동일 일어났다. 그도 그 운동에 가담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당했다. 그리고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했다. 아마 김치선 박사의 강한 민족주의 애국운동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생을 12시 고동소리와 함께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수시로 눈물을 흘린 삶은 민족과 국가를 위한 그의 심정이 어떠했느냐를 대변해 주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목회할 때 내선일체에 맞도록 한국말로 설교하지 말고 일본어로 설교해야 한다는 정책에 반항했다는 죄목으로 1940년 왜인들의 경찰에 체포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가끔 김치선 박사의 설교 녹음을 듣게 될 때 긴장되는 것은 그분의 한국민족을 향한 애절한 외침과 눈물이 언제 터져 나오느냐? 이었다. 그 같은 느낌이 들자마자 목소리가 높아지며 눈물로 호소하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설교가 시작되고 약 5분이 지나면 목이메인 외침이 시작되었다. 왜인들에게 당한 한국 민족의 한이 깃들어 있었던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아마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고 제자들에게 호소하면서 국민의 11조 300 만 성도를 달라고 기도한 신념이 여기서부터 나온 것이다. 복음화 운동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분이 순교자 손양원 목사와 절친하게 지냈던 일도 미루어 보면 민족 사상이 깊이 깃들어 있었던 연고로 생각되어 진다. 손양원 목사와 300만 전도운동을 함께 한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비화를 언급할 것이 있다. 김치선 박사는 손양원 목사를 모시고 남대문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총살한 안00이라는 살인자를 아들로 삼아 부흥회에 데리고 오셨다. 남대문 교회 앞에 세계의 성자 손양원 목사 라는 포스터를 크게 써서 매달았다. 그때 손양원 목사는 그 포스터를 떼지 않으면 부흥회를 인도할 수 없다고 우겼다. 하는 수 없이 그 포스터를 걷어내고 부흥회를 열게 되었다. 

 

지금도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인 여수 애양원에 가면 손양원 목사와 김치선 박사 두 분이 다정하게 앉아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김치선 박사가 한국에서 활동한 거점은 남대문 교회와 대한신학교이다. 당시 남대문 교회는 교통이 원활한 서울역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갈라지기 전에 전국에서 영락교회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선생이 자주 출석하기도 했다.

 

 1948년 8월에 야간에 공부하는 대한신학교를 남대문 교회에 창설하였다. 초대 원장에 윤필성 목사가 취임하였고 뒤이어 1년 후에 김치선 박사가 취임하였다. 북에서 남으로 넘어와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신학교였다. 이 학교가 대신교단을 설립하는 모체가 된 것이다. 교단은 신학과 정치적 일치를 통해 형성된다. 그 신학을 형성하는 모체가 신학교이다. 신학교의 노선은 교단의 신학을 결정하는 뿌리이다. 구미의 역사가 그랬다. 신학교의 자유주의화는 교단의 멸망을 촉진하는 원인이다. 

 

교회의 문제는 신학교의 문제로 연결된다. 신학교의 문제는 이사진과 교수들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사진과 교수들이 돈과 자신의 영예만을 위해 정치를 일삼을 때 신학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럴 때 학생들은 성경에 기초한 신학을 배울 수 없다. 후에 그들이 남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정치에 매진하게 된다. 

 6.25 전쟁이 휴전됨에 따라 서울에 평화가 깃들고 대한신학교를 다시 개강하게 되자 학생들이 날로 늘어가게 되었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다시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신학교 7회와 8회에 학생 수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때 졸업한 학생들이 졸업 후 교계의 각계각층에서 많은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1954년 김치선 박사는 기도에 열중하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도원 자리를 찾아 나섰다. 지금의 서울대 자리에 벧엘 기도원을 세웠다. 당시 많은 대한신학교 학생들이 시간이 나는 대로 관악산 벧엘 기도원을 찾아가 기도에 몰두한 적이 수없이 많았다. 

 

 더불어 김치선 박사에게 닥친 환란은 겹치고 또 겹친 사건들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대한신학교 건물과 한양교회(창동교회를 개명)의 화재로 전소된 사건,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양회에 가서 7명이나 익사한 사건, 그리고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법적 다툼 등이었다. 

 

6.25 남침으로 인하여 피난 중에 남대문 교회는 다른 목사가 와서 목회하게 되자 김치선 박사는 한양교회를 새로 설립하고 남산 2,500평의 땅위에 세워진 일제 때의 신사(神社) 건물을 매입하여 교회와 학교로 사용하던 중 1956년 어느 날 새벽에 신학교와 한양교회가 전소된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김치선 박사는 충격을 받아 병중에 눕게 되었다. 남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건물은 전소되고 땅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폐허된 땅에 임시로 대형 콘세트를 세워 신학교와 교회를 함께 사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속적으로 일어난 마찰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부가 대한신학교와 한양교회가 사용하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한 결과 벌어진 소송과 더불어 정부의 시책이 발표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신학교는 하나의 교단을 배경으로 하여 운영하라는” 것이었다. 대한신학교는 1952년 4년제 각종 대학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교단과 관계를 가져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대한신학교는 합동측 총회의 야간 신학교로 운영을 해 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단독 교단을 만들어야 할 형편이었다. 

 

김치선 박사는 당시 근본주의의 선두주자였던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의 총재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와 연관을 맺고 1960년 성경장로회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1966년 김치선 박사는 암스텔담에서 열린 ICCC 국제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다. 그것이 국제대회에서의 마지막 강단이었다. 잠시 미국에 들러 필라델피아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쉬고 귀국하려던 참이었다. 거기서 갑자기 쓰러져 전신을 쓰지 못한다는 통보가 한국으로 날아들었다. 언어도 쉽게 구사할 수 없었고 대소변도 자유롭지 못했다. 머리에 혹이 생겨 미국에서 8시간이란 긴 수술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날로 쇠약해져 갔다.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최순직 목사를 귀국하도록 하여 신학교를 돕게 하였다. 최목사는 어느 정도 학교의 급한 일을 수습한 후에 다시 학업을 마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급하게 25세의 젊은 나이로 김치선 박사의 외아들 김세창 박사가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김치선 박사는 1967년 12월 21일 이사 최용찬 장로와 김세창 교장을 불러 마지막 회의를 주관했다. 1968년 2월 24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김치선 박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쉼을 누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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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김치선 박사의 신학과 목회철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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